어렸을 때 동무들과 추석에 울바위 올라가 마당바위에서 우리 동네를 바라보면 정남향 마을이다. 뒷동산 동쪽 끝자락 중간 쯤 대숲이 뒤 울타리를 한 기와집의 분홍 꽃을 보면 정말 그림 같았다. 그 아래는 대 밭이 조금 동쪽으로 비켜 있었고 그 대숲 아래도 기와집이 있었는데 대소가들이다. 아랫집은 6.25사변 지나고 몇 년 뒤 그 집보다 일찍 뜯기었다.
윗집은 6.25사변 전에 대전으로 이사를 가고, 아래 동네에서 이사를 왔다. 그 집은 딸이 다섯인데 모두 예뻤다.
전 주인이 살 때는 사랑채의 한 칸을 동무 네가 얻어 곁방살이로 살아서 그 집에 놀러 다니며 뒤뜰 툇마루에서 소꿉놀이도 하며 놀았다. 마당 앞에는 큰 화단에 이름 모르는 꽃들이 아름답게 피었었고 담에는 담쟁이덩굴이 뻗었었다. 담 밖의 배롱나무 밑 언덕에는 울긋불긋 나팔꽃들이 피어 따기도 했지.
새로 이사 온 집은 내 동갑내기도 있어서 여름에는 사다리로 다락에 올라가서 아가씨들이 뜨개질과 길쌈하는 것을 보았다. 배롱나무가 그 집의 기막힌 흥망성쇠를 말없이 지켜보다 다 뜯기고 밭으로 변한 모습을 십 년도 넘게 보고 있었는데 우리 이사 온 후로 어느 해인가 서울 사람이 조경수로 사갔다 한다.
6.25 사변으로 위 집의 남자는 친척들 손에 끌려가 죽고, 아래 집은 남자가 끌려가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모른다 하던 동네 사람들의 말이 있었다. 그 사람이 총살에 죽을 차례인데 앞에 두 사람 밖에 없었고 세 번 짼데 모두들 양쪽 손을 쳐들고 있는데 해방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다 한다. 끌려간 지 한 보름 되었다는 것 같았는데 무슨 일을 당했는지는 나는 모르지만 그 얼굴을 보니 여기저기 검정이로 칠한 것 같았다.
위 집은 6.25 사변 때 날마다 초상집처럼 대성 통곡 소리가 온 마을을 슬픔에 잠기게 했다. 날마다 친척들이 찾아와 빨갱이에 가입하지 않는다고 두들겨 주고 침 뱉고 머리끄덩이 잡고 흔들고, 물건을 빼앗아 간다고 했다. 그래서 유순하게 생긴 그 집 아주머니는 딸 혼수 감과 재봉틀을 뺏길 가봐 남의 집에 맡기곤 했다.
그 때만 해도 여자는 집안에서만 살던 시대라 그랬는지 해방되어 몇 년 살다가 집 뜯어 밭 일군다는 집에 팔고 도로 고향으로 들어가서 양 아들도 들이고 살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외가가 지장골이이기 때문에 우리 큰 밭 길을 지나서 용골 가는 길에 당산뫼라는 고개를 지나야 하는데 길이 가로질러 아래에는 오막살이 두 채가 있었는데 그 중 한 집은 내가 기억하는 이름이 틀리겠지만 박빙어리 네가 살고 있었는데 그 집도 6.25 때 몽둥이로 맞았느니 어쨌느니 사람만 모이면 두 집이 당한 얘기가 참 걱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