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

[스크랩] 식민하의 황족들

채운산 2008. 8. 21. 23:19
일본에 인질로 간 의천왕의 두 아들 

모두 그곳에서 죽고, 이내 잊혀졌다  



식민하의 황족들
일본의 책방에는 메이지 천황, 쇼와 천황에 관한 책들이 널려져 있다. 그러나 우리 왕가와 관련된 책은 민비(명성황후), 이은 왕세자 부부에 관한 것 정도이다. 고종, 순종에 관한 책은 아예 없다. 물론 대원군 등 다른 왕족에 대한 것도 없다. 일본의 대한(對韓) 관심 폭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제시대 고종의 손자 둘이 일본에 인질로 가고 그곳에서 죽었는데도 그런 사실 조차 우리는 물론 일본인들도 모른다. 

일제 시대 조선왕족을 이은(李垠, 1897-1970), 이건(李鍵, 1909-91), 이우(1912-45) 3인으로 정했고 이를 삼가(三家)라 했다. 이 중 영친왕 이은은 조선조 마지막 왕세자였다. 그가 1970년 죽음으로서 정통 왕가의 맥은 막을 내린 셈이다. 그는 박정희 시대 매스컴에 오르내렸고 부인 방자에 대해서는 일본인의 관심도 높았다. 
그러나 이건, 이우 형제는 잊혀졌다. 이건은 일본인으로 귀화, 일본인화 되어 잊혀졌고 이우는 해방되기 전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해 잊혀졌다. 
이제 그들 형제와 관련된 현장을 다시 찾아보기로 한다. 

고종의 둘째 아들이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 1877-1955)공이다. 그는 자식을 22명 두었는데 아들 13명과 딸 9명이었다. 엄청난(?) 숫자라 할 수 있다. 그들 중 이건과 이우 형제가 이왕직에서 공식적으로 기록한 강의 아들이었다. 

일본의 인질이 된 왕족들 
장남 이건은 1909년 서울에서 태어나 9살 때인 1918 년 일본으로 끌려갔다. 학습원 초등과에 들어가 일본인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어 13세에는 동경 육군유년학교에 들어갔다. 역시 일본군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3년간 일본군의 훈련을 받는다. 

동생 이우도 1922년 6월 일본으로 끌려간다. 형과 같이 학습원 초등과를 거쳐 1925년 동경 육군 유년학교 30기생으로 입교한다. 모두 삼촌 영친왕과 같은 코스였다. 그들의 유년학교 입학 기록을 보면 영친왕은 14기, 이건은 27기, 이우는 30기였다. 

이우는 1929년 일본 육사 45기로 입교한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소위로 임관된다. 그즈음인 1930년에는 대원군의 장손자인 이준용에게 입양된다. 준용의 후사가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대원군의 장손자가 된 것이다. 따라서 1930년부터는 이우공 전하로 승격된다. 
의친왕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1930년 6월 12일자로 은퇴를 하고 공의 칭호와 모든 재산을 큰 아들 건에게 상속한다. 그가 살던 집 사동궁(寺洞宮) 역시 건에게 상속된다. 그리고 강제로 일본으로 건너가 살게 된다. 

필자는 사동궁 건물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10년여 전 사동궁 사진을 갖고 있는 분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여류 건축가 조인숙 소장으로부터 들었다. 그래서 그 후 미국에 가는 길이 있어 일부러 전화를 드리고 뉴욕의 콜롬비아 대학을 찾아 갔다. 이혜경 여사를 그곳에서 만났다. 그녀는 그 대학 동양학 도서관 사서였다. 그녀는 귀중한 파일에서 사동궁 사진을 꺼내 보여 주었다. 처음 보는 사진이었다. 누렇게 색 바랜 사진은 역사가 잔뜩 묻어 있는 듯 했다. 그녀는 자신이 의친왕의 딸이라고 했다. 이건, 이우의 여동생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동궁에서 산 적이 있다고 했다. 
사진에서 보면 조선의 전통 가옥이 둘러친 가운데 이양관이 우뚝 들어서 있다. 정면 세 칸 짜리 2층의 르네상스 건물이다. 2층은 베란다 형식이다. 운현궁 이양관과 유사한 형태를 갖고 있다. 그녀는 해방 직후 김구와 김규식 그리고 임시정부 각료 등이 사동궁 자신의 집을 방문한 것을 본 적이 있다고도 했다. 
그 사동궁 건물은 해방 후인 1947년 7월 경 헐값에 방매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종로예식장이 들어섰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입시 학원이 들어서 있다. 

일본 여자와 결혼 그리고 이혼
이건은 1931년 일본 여자 마쓰히라 요시코(松平佳子)와 정략 결혼했다. 요시코 비(佳子妃)라 불렸는데, 그녀는 숙모 방자의 어머니 쪽 친척이었다. 이건은 1936년 육군대학에 들어갔다. 왕족들이 가는 정통 코스였다.

1944년 미국의 도쿄 공습 때 이건은 부인과 함께 아사마(淺間) 온천으로 소개되었다. 패전 후인 1947년 10월 18일 신적강하(臣籍降下)가 명령되었다. 직궁삼가(直宮三家) 외에는 모두 평민이 된 것이다. 직궁삼가는 히로히토 천황의 3형제를 말하는 것이다. 의친왕, 방자, 이구, 이건 등 조선의 왕족은 모두 평민이 되었을 뿐 아니라 일본 국적에서도 벗어 났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 생활이 문제가 되었다.

이건의 전락 
평민이 된 이건 부부는 이후 일본에 귀화해 이름을 모모야마 겐이치(桃山虔一)로 바꿔 버렸다. 그들은 시부야 역전 서쪽 모퉁이에 있는 바라크 건물의 야미이치(闇市)에서 모모야(桃屋)란 시루코야(단팥죽 집; 汁粉屋)를 열었다. 장사꾼이 된 것이다. 이후에는 시부야 시장에서 모모야 다방을 열었고, 불타버린 궁터에서 산양을 길러 젖을 팔기도 했다. 트럭으로 운송업도 하고 긴자에 있던 긴로쿠(銀六) 백화점에서 과자점을 내기도 했다. 
요시코는 사교계로 나서 긴자 구락부의 사장이 되었으나 모모야마는 등사 인쇄 일을 배우러 학교에 다녔다. 그런 와중에 이건은 마에다(前田美子)란 여자와 사귀게 되어 요시코와 헤어지게 된다. 1951년 5월 이혼했다. 이는 일본 황실에 있어서는 이혼 제 1호가 된 일이기도 했다. 이혼 후 장남(忠久)은 이건이, 차남(欣也)과 장녀(明子)는 요시코가 각각 맡았다. 

이우의 죽음
의친왕이 김씨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이 이우였다. 일제 역시 이우도 정략결혼을 기도했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박영효의 손녀 박찬주(朴贊珠)와 결혼했다. 당시 박현주는 경기여고 학생이었다. 

군 장교가 된 이우는 일본에 있던 가족을 경성으로 돌려보내고 단신 중국으로 갔다. 중국에 파견되었던 이우는 1944년 7월 16일 경성으로 돌아 왔다. 히로시마(廣島)로 가기 싫어서 경성에서 머뭇거렸다. 용산으로 갔으면 했다. 운현궁과 사동궁에서 가족과 함께 살고 싶었다. 일본의 패전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며칠 후 도쿄로 돌아간 그는 히로시마로 갔다. 그것은 죽음의 길이었다. 이우는 당시 기정(基町)의 일본군 제 2총군에 참모로 근무하고 있었다. 계급은 중좌(중령)였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떨어졌다. 이우는 그 시간 말을 타고 출근 중이었다. 그는 본천교(本川橋) 다리 위에서 바로 피폭 당했다. 34세였다. 
그의 시신은 비행기로 경성으로 옮겨졌다. 일본인 전속 부관은 할복자살했다. 그에게는 당시 10세의 이충과 5세의 이근이 있었다. 
이우의 폭사 사실은 비밀에 붙혀졌다. 뉴스로 다뤄졌으나 관심이 없었다. 그는 원폭 사망자 20만명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일본 황족 중 원폭에 피해를 본 사람은 없었다. 

8월 12일 도쿄 궁성에서는 일본 황족회의가 열렸다. 13인의 황족, 왕공족 남자가 참가했다. 말석에는 이은, 이건이 자리했다. 폭사한 이우는 물론 그 자리에 없었다. 이 회의는 일본제국주의가 마지막을 알리는 자리였다. 
이우의 장례식은 1945년 8월 15일 동대문 운동장에서 거행되었다. 10년 후인 1954년 1월 미망인 박찬주와 아들 이청이 도쿄를 방문한다. 박찬주는 운현궁에 살다 1995년에 죽었다.

다시 원폭 돔에서 
나는 2002년 11월 14일 원폭 돔 보존공사 현장에 갔었다. 특별히 공사장 안을 둘러 볼 수 있었다. 감개가 무량했다. 매번 멀리서만 보던 원폭 돔이었다. 
원폭 돔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한 보강 공사는 1967년 그리고 1990년 각각 시행된바 있다. 이번이 세 번 째인 것이다. 원폭 돔은 1996년 12월 27일, 세계 문화유산으로 결정되었다. 미국의 반대 속에 결정된 것이다.

공사장 안내자는 이 공사는 ‘국내외의 평화를 기원하는 많은 사람들의 다액의 기금을 받아 하는 공사’라고 말했다. 이 기금의 일부가 공사비에 충당되고 있다한다. 
그들은 장래의 보강공사를 준비하기 위해 원폭 돔 보존사업기금을 계속 설치해 두고 있다 한다. 
문화유산 중 인류의 과오를 보여주는 유산은 부(負) 즉, ‘마이너스 유산’이라 한다. 현재 마이너스 유산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바르샤바 역사지구 등이 있다. 히로시마의 원폭 돔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닮은꼴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이것들이 지금 관광요소로 극대화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원폭 돔에서 보이는 저 다리 위에는 이우의 피폭 모습이 찍혀 있는 것 같았다. 너무나 억울한 죽음이었다. 이우는 평소 문화재 보존 의식도 강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아마 지금 이 원폭 돔을 한의 눈으로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당시 한 조선인의 눈에 보인 그 날의 상황을 다시 읽어 본다. 히로시마 히바군(比婆郡)의 산촌에 살던 장복순(張福順)이란 여자 어린이가 쓴 글이다. 

‘초토(焦土)에서의 조선인 자멸(自滅)’

그 여름날 아침... 피폭 직후 어머니와 시내로 들어 왔다. 어머니는 동포들의 안부를 묻고 돌아 다녔다... 지금 그 참상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의사와 약품은 일본인에게만 해당됐다. 조선인은 죽음만 기다릴뿐... 어머니의 ‘아이고( )’ 소리만 들려 올 뿐... 타국에 끌려와 소·말같이 쓰러지다니... 최후에는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가고.... 어머니가 이렇게 슬피 우는 것을 나는 처음 보았다...
일본인이 좋아하는 학자 야나기다(柳田國男)는 ‘사심(史心)’이란 것을 말했다. 사심은 모든 사물을 볼 때 항상 역사를 생각하라는 의미이다. 지금 일본인들은 원폭 현장을 보며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조선인의 한을 잊지는 않았는지...

어쨌든 일제에 의해 조선 왕실의 문은 닫혀졌고, 그 마지막 왕손도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 8.15를 맞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출처 : 왕실과 황실의 역사▶역사지식Cafe
글쓴이 : 지 기ノ인 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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