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

[스크랩] 영친왕의 약혼녀민갑완..

채운산 2008. 8. 21. 23:07

조선 왕조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열한살 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일본 황실의 공주 마사코(李方子)와 정략결혼하여 평생을 일본에서 산 비운의 사나이. 그에게는 마사코와 결혼하기 전 이미 혼약을 맺은 조선인 약혼녀가 있었다. 우리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그 약혼녀의 이름은 민갑완(閔 甲完).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와 같은 집안인 여홍 민씨 민영돈의 딸이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깊은 인연이었다. 영친왕과 민갑완은 같은 날, 비슷한시각에 태어났다. 그날은 마침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기 일이기도 했다. 두 사람이 열한살 되던 1907년, 민갑완은 세자빈으로 간 택되었다. 남은 절차는 택일하여 혼례식을 올리는 일뿐. 바로 그때, 일본은 "유학"이란 구실을 붙여 영친왕을 데려갔다. 말이 유학이지 실은 볼모였다.

십년의 세월이 흘러 민갑완은 스물한살의 과년한 처녀가 되었다. 그사이 한일합방이 이루어졌고, 영친왕은 일본에 발이 묶여 있었다. 십년을 하루같이 영친왕의 귀국과 혼례만을 기다리며 책을 벗삼아 지내던 민갑완에게어느 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파혼이었다. 영친왕은 일본의공주와 결혼할 예정이라 했다.

조선 왕실의 법도는 한번 왕비로 간택된 사람은 설령 파혼되더라도, 결코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도 총독부는 민갑완의 아버지에게 "딸을 1년 안에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지 않으면 부녀가 중죄를 받겠다"는 각서를 쓰게 강요했다. 영친왕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으려 한 것이다. 심지어는 민갑완을 일본인과 강제 결혼시키기 위해 겁탈할 계략까지 꾸미기도 했다.

영친왕과 마사코의 결혼식이 일본에서 치러지고 3개월 뒤, 민갑완은 중국상하이로 망명했다. 더 이상 조선에 남아 있기 어려웠기에 감행한 망명이 었다. 그러나 일본의 핍박은 집요했다. 임시정부 요인 김규식의 도움을 받아 미국인이 운영하는 학교에 들어간 갑완이 신학문 공부에 한창 재미들일 즈음이었다. 일본영사관 사람이 학교에 찾아와 갑완에 대해 이것저것 캐물었다. 교장은 결국 갑완을 학교에 나오지 못하게 했다. 갑완은 또한번 좌절했다.

김규식은 민갑완에게 이참에 아예 독립운동에 나서는 게 어떠냐고 했다. 민갑완은 거절했다. "나 하나의 희생으로 만사가 평온하기를 바랄 뿐" 이라면서. 만약 그때 김규식의 권유대로 독립운동에 나섰더라면 민갑완의삶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갑완은 철저히 왕가의 여인이었다. 십년 동안 오로지 충실한 왕가의 여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을다져오지 않았던가.

민갑완은 책과 뜨개질로 세월을 보냈다. 몇번 혼담이 들어왔지만 모조리 거절했다. 결혼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이 그에게는 독립운동이요, 자신을 지키는 일이었다. 그러기를 무려 25년. 마침내 조선이 해방되고 갑완 도 귀국했다. 어쩌면 갑완은 왕조가 복위되어 자신이 황태자비가 되리란 기대를 은연중에 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고독과 가난뿐이었다. 아무도 더이상 왕이나 황태자비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18년 뒤인 1963년, 영친왕이 마침내 귀국했다. 뇌연화증으로 식물인간이 된 채. 그러나 민갑완은 영친왕을 만나지 못했다. 두 사람은 평생 단 한번도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다. 영친왕은 민갑완의 존재를 기억 하고나 있었을까?

민갑완의 생애는 역사가 한 개인의 삶을 얼마나 처절하게 굴절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하지만 민갑완은 처절한 굴절을 겪으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굳게 믿었던 조선 여인의 윤리와 도덕을 지키기 위 해 왕가와의 혼약에 일생을 걸었다. 누가 강제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택한일이었다.

 

1968년 3월, 민갑완은 후두암으로 71세의 생을 마감하고 부산 천주교 공동묘지에 묻혔다.

출처 : 왕실과 황실의 역사▶역사지식Cafe
글쓴이 : 지 기ノ인 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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