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대한황실----
고종황제의 직계손이라고 할 수 있는 후손들은 현재 손자뻘이 모두 12명. 고종의 세째 아들
인 영왕의 아들 이구씨와 둘째 아들인 의왕의 자손 11명이다. 이들중 국내에 있는 후손은 3
명뿐. 의왕의 열째 아들인 이영길씨(55)와 세째딸 해춘씨(75), 아홉째 딸 해연씨(45)이다. 나
머지 는 모두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
고종은 민황후를 비롯, 엄비 6명의 비-빈-후궁에서 아들 9명에 딸 4명 등 모두 13명의 자식
을 낳았다.하지만 대부분 어려서 죽고 황후 민씨의 소생의 순종, 귀인 장씨의 의왕, 엄비의
영왕, 귀인 양씨 소생의 덕혜옹주가 있었다.
첫째인 순종은 자식이 없고 셋째인 영왕은 이방자여사와 결혼해 두아들을 낳았다. 큰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막내인 구는 우크라이 나계 미국여자 줄리아와 결혼했으나 자식이 없다.
덕혜옹주는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종무지백작과 결혼, 딸을 얻었으나 현해탄에서 의문의 죽
음을 당했다.
이들과 달리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왕 이강은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처럼 7명의 부인 사이에
서 12남 9녀라는 많은 자손을 남겼다.
장남 용길씨는 수년 전에 숨졌고, 둘째 우씨는 대원군의 손자 준용씨가 아들이 없자 대원군
의 증손자로 입적했다. 군에 입대했던 그는 45년 히로시마 원폭투하때 사망했는데 그의 부
인 박찬주씨는 운현궁에 살다 95년 죽었다. 토목공 학과를 나온 그의 아들 청씨(60)가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90년 귀국, 어머니가 죽은뒤 운현궁을 서울시에 넘기고 현재 북아현동에
살고 있다.
3남 흥길씨는 어려서 병사했고, 4남 창길씨는 안평대군 가문의 양자로 입적했으나 포장마차
등 어렵게 살다가 수년 전 숨졌다.
5남 수길씨는 농대를 졸업, 허정 내각때 문화재 관리소장을 지냈으며 전주 이씨 종약원 이
사장을 지냈고 82년 사망했다. 그의 부인 김신덕씨(74)는 현재 개포동 1단지 시영아파트에
살고 있다.
6남 명길씨는 국회사무처 수위와 홍릉 관리인을 지내다 84년 죽었으며 부인 황경생씨가 아
들과 함께 살고있다. 아들 준씨(35)는 외판원을 하고 있다.
7남인 형길씨는 교사로 근무하다가 부산에서 익사했고, 8남인 경길씨는 아버지의 묘소인 화
양리 의왕묘소 관리인을 했으며 얼마전 수원의 양로원에서 죽었다. 그는 덕수궁에서 태어나
해방되던 1945년까지 덕수궁 안 연못옆에 있는 한옥에 살았던 덕수궁의 주인이었다.
9남 충길씨(58)는 80년 이민을 가서 미국에서 잡화상을 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 의왕의 장례
식때 나타나 「어머니 별명이 깨떡어미」라고 주장, 의왕의 본부인인 덕인당 김씨에게 자식
으로 인정을 받았다.
10남 영길씨는 외국어대 서반어과를 졸업하고 이석이란 이름으로 가수를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 95년 영구 귀국후 황실의 자존심을 찾기 위해 백방을 뛰어 다니시다 현재 전주에 정착했다.
11남 문길씨(54)는 85년 미국으로 이민가 노동을 하며 어렵게 살고 있다.
12남 정길씨는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자동차정비공으로 일하고 있는데 자식은 없다.
딸들은 의왕이 살아있을 때까지 제대로 교육비를 지원받고 양반가문에 시집을 갈 수 있었
다. 3째딸까지는 모두 경기여고를 나왔다. 하지만 이들이 시집을 간 곳도 현대사회에서 적
응하기 힘든 몰락한 양반가문이 되면서 역시 궁핍한 처지로 바뀌고 말았다.
첫딸 해완은 자식없이 일찍 죽고 둘째 해원씨(79)는 강원도 강릉의 둘째아들 집에 살다가 3
년전 미국 로스앤젤리스의 방송기술자로 일하는 큰아들한테 갔다. 해춘씨는 운전기사로 일
하는 서울 명일동의 아들집에 살고 있고 해경씨(65)는 음악학과를 졸업한뒤 6.25직후 도미,
아시아도서관에서 일하며 독신으로 살고 있다. 해란씨(53)는 82년 이민을 떠나 봉제공장을
하고 있으며, 해연(47)은 선릉관광묘원을 운영하는 남편과 분당에 살고 있다.
셋째 딸인 해춘씨는 어머니가 궁녀출신으로 안암동에 살았는데 학교가 끝나면 매일 사동궁
에 들어가 아버지 의왕께 문안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사동궁(현재 종로예식장터)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양관, 사랑방 등 10여개의 큰 방이 있는 곳이었다. 특히 큰어머니인 덕인당 김씨
는 부인들이 7명씩이나 되는 집안을 잘 통솔했는데 일제시대 때만해도 부인과 자식마다 1인
당 당시돈 1백원씩 계산해 생활비를 대주었다고 한다.
해춘씨는 『왕손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 우스운 일처럼 돼버렸지만 지금도 궁중사극에
나오는 의상을 보면 옛날생각이 나 TV를 끈다』고 말한다.
영길씨는 『왕손이라 원래 호적이 없어서 6.25때 친척아저씨의 도움 으로 호적을 만들게 되
었다』며 『배급을 타먹을 근거를 만들기 위한 것이 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동궁에서 어
린시절을 보내고 아버지가 사동궁을 팔아 넘긴뒤 해방뒤부터는 아버지의 별장이 있던 혜화
동의 성낙원과 별궁(풍문여고 뒷편)을 거쳐 칠궁에 살았다. 79년까지 칠궁에 경길씨 내외 와
살았는데 정권이 들어선 뒤 이옆에 영빈관을 지으면서 내쫓았다는 것이다.
영길씨는 『개포동의 15평 아파트 한채를 받고 내쫓겼다』며 『궁에서 쫓겨나면서 우리가
안고 살던 황손이란 의미조차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말했다.
1963년 구왕실재산 정부귀속당시 밝혀진 조선왕실 소유 토지는 건축 부지와 임야를 포함, 1
억2백40만평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국유화시킨뒤 문화재관리특별회계법에 따라 구
황족의 생계유지비가 지급됐는 데 대상자는 낙선재 윤비 등 고종의 아들, 며느리, 딸 등 7명
뿐이었다.
이들 황손중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 이구와 이영길씨이다.
영왕과 이방자여사의 외아들인 이구씨는 공대를 졸업한뒤 63년 귀국, 사업을 시작했다가 79
년 6월 부도가 나면서 으로 피신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여성인 쥴리아씨와 결혼했으나 어머니가 일본인이고 부인도 미국인
이라는 종친들의 여론에 밀려 이혼했다. 현재 일본에서 특별한 직업없이 공대 동기생인 점
성가인 여자와 살고 있으나 그는 영왕의 직계로 황실을 대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영길씨는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적 은 없다. 오직 일제가 강점, 서류를 위조
했을 뿐』이라며 황실복원운동에 나서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행동이라는 손가락질도 있지만
이씨는 94년 6월 대한황실 종정부를 구성,대한제국 황실복원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참고 : 이 글은 2003년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나이에 오차가 있습니다.)
고종황제의 직계손이라고 할 수 있는 후손들은 현재 손자뻘이 모두 12명. 고종의 세째 아들
인 영왕의 아들 이구씨와 둘째 아들인 의왕의 자손 11명이다. 이들중 국내에 있는 후손은 3
명뿐. 의왕의 열째 아들인 이영길씨(55)와 세째딸 해춘씨(75), 아홉째 딸 해연씨(45)이다. 나
머지 는 모두 외국으로 이민을 갔다.
고종은 민황후를 비롯, 엄비 6명의 비-빈-후궁에서 아들 9명에 딸 4명 등 모두 13명의 자식
을 낳았다.하지만 대부분 어려서 죽고 황후 민씨의 소생의 순종, 귀인 장씨의 의왕, 엄비의
영왕, 귀인 양씨 소생의 덕혜옹주가 있었다.
첫째인 순종은 자식이 없고 셋째인 영왕은 이방자여사와 결혼해 두아들을 낳았다. 큰아들
진은 어려서 죽고 막내인 구는 우크라이 나계 미국여자 줄리아와 결혼했으나 자식이 없다.
덕혜옹주는 대마도 번주의 아들인 종무지백작과 결혼, 딸을 얻었으나 현해탄에서 의문의 죽
음을 당했다.
이들과 달리 고종의 둘째 아들인 의왕 이강은 자유분방한 그의 성격처럼 7명의 부인 사이에
서 12남 9녀라는 많은 자손을 남겼다.
장남 용길씨는 수년 전에 숨졌고, 둘째 우씨는 대원군의 손자 준용씨가 아들이 없자 대원군
의 증손자로 입적했다. 군에 입대했던 그는 45년 히로시마 원폭투하때 사망했는데 그의 부
인 박찬주씨는 운현궁에 살다 95년 죽었다. 토목공 학과를 나온 그의 아들 청씨(60)가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90년 귀국, 어머니가 죽은뒤 운현궁을 서울시에 넘기고 현재 북아현동에
살고 있다.
3남 흥길씨는 어려서 병사했고, 4남 창길씨는 안평대군 가문의 양자로 입적했으나 포장마차
등 어렵게 살다가 수년 전 숨졌다.
5남 수길씨는 농대를 졸업, 허정 내각때 문화재 관리소장을 지냈으며 전주 이씨 종약원 이
사장을 지냈고 82년 사망했다. 그의 부인 김신덕씨(74)는 현재 개포동 1단지 시영아파트에
살고 있다.
6남 명길씨는 국회사무처 수위와 홍릉 관리인을 지내다 84년 죽었으며 부인 황경생씨가 아
들과 함께 살고있다. 아들 준씨(35)는 외판원을 하고 있다.
7남인 형길씨는 교사로 근무하다가 부산에서 익사했고, 8남인 경길씨는 아버지의 묘소인 화
양리 의왕묘소 관리인을 했으며 얼마전 수원의 양로원에서 죽었다. 그는 덕수궁에서 태어나
해방되던 1945년까지 덕수궁 안 연못옆에 있는 한옥에 살았던 덕수궁의 주인이었다.
9남 충길씨(58)는 80년 이민을 가서 미국에서 잡화상을 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 의왕의 장례
식때 나타나 「어머니 별명이 깨떡어미」라고 주장, 의왕의 본부인인 덕인당 김씨에게 자식
으로 인정을 받았다.
10남 영길씨는 외국어대 서반어과를 졸업하고 이석이란 이름으로 가수를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 95년 영구 귀국후 황실의 자존심을 찾기 위해 백방을 뛰어 다니시다 현재 전주에 정착했다.
11남 문길씨(54)는 85년 미국으로 이민가 노동을 하며 어렵게 살고 있다.
12남 정길씨는 미국 로스앤젤리스에서 자동차정비공으로 일하고 있는데 자식은 없다.
딸들은 의왕이 살아있을 때까지 제대로 교육비를 지원받고 양반가문에 시집을 갈 수 있었
다. 3째딸까지는 모두 경기여고를 나왔다. 하지만 이들이 시집을 간 곳도 현대사회에서 적
응하기 힘든 몰락한 양반가문이 되면서 역시 궁핍한 처지로 바뀌고 말았다.
첫딸 해완은 자식없이 일찍 죽고 둘째 해원씨(79)는 강원도 강릉의 둘째아들 집에 살다가 3
년전 미국 로스앤젤리스의 방송기술자로 일하는 큰아들한테 갔다. 해춘씨는 운전기사로 일
하는 서울 명일동의 아들집에 살고 있고 해경씨(65)는 음악학과를 졸업한뒤 6.25직후 도미,
아시아도서관에서 일하며 독신으로 살고 있다. 해란씨(53)는 82년 이민을 떠나 봉제공장을
하고 있으며, 해연(47)은 선릉관광묘원을 운영하는 남편과 분당에 살고 있다.
셋째 딸인 해춘씨는 어머니가 궁녀출신으로 안암동에 살았는데 학교가 끝나면 매일 사동궁
에 들어가 아버지 의왕께 문안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사동궁(현재 종로예식장터)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양관, 사랑방 등 10여개의 큰 방이 있는 곳이었다. 특히 큰어머니인 덕인당 김씨
는 부인들이 7명씩이나 되는 집안을 잘 통솔했는데 일제시대 때만해도 부인과 자식마다 1인
당 당시돈 1백원씩 계산해 생활비를 대주었다고 한다.
해춘씨는 『왕손이라는 것을 내세우는 것이 우스운 일처럼 돼버렸지만 지금도 궁중사극에
나오는 의상을 보면 옛날생각이 나 TV를 끈다』고 말한다.
영길씨는 『왕손이라 원래 호적이 없어서 6.25때 친척아저씨의 도움 으로 호적을 만들게 되
었다』며 『배급을 타먹을 근거를 만들기 위한 것이 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동궁에서 어
린시절을 보내고 아버지가 사동궁을 팔아 넘긴뒤 해방뒤부터는 아버지의 별장이 있던 혜화
동의 성낙원과 별궁(풍문여고 뒷편)을 거쳐 칠궁에 살았다. 79년까지 칠궁에 경길씨 내외 와
살았는데 정권이 들어선 뒤 이옆에 영빈관을 지으면서 내쫓았다는 것이다.
영길씨는 『개포동의 15평 아파트 한채를 받고 내쫓겼다』며 『궁에서 쫓겨나면서 우리가
안고 살던 황손이란 의미조차 모두 사라져 버렸다』고 말했다.
1963년 구왕실재산 정부귀속당시 밝혀진 조선왕실 소유 토지는 건축 부지와 임야를 포함, 1
억2백40만평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국유화시킨뒤 문화재관리특별회계법에 따라 구
황족의 생계유지비가 지급됐는 데 대상자는 낙선재 윤비 등 고종의 아들, 며느리, 딸 등 7명
뿐이었다.
이들 황손중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 이구와 이영길씨이다.
영왕과 이방자여사의 외아들인 이구씨는 공대를 졸업한뒤 63년 귀국, 사업을 시작했다가 79
년 6월 부도가 나면서 으로 피신했다.
그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여성인 쥴리아씨와 결혼했으나 어머니가 일본인이고 부인도 미국인
이라는 종친들의 여론에 밀려 이혼했다. 현재 일본에서 특별한 직업없이 공대 동기생인 점
성가인 여자와 살고 있으나 그는 영왕의 직계로 황실을 대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영길씨는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 적 은 없다. 오직 일제가 강점, 서류를 위조
했을 뿐』이라며 황실복원운동에 나서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행동이라는 손가락질도 있지만
이씨는 94년 6월 대한황실 종정부를 구성,대한제국 황실복원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참고 : 이 글은 2003년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나이에 오차가 있습니다.)
출처 : 왕실과 황실의 역사▶역사지식Cafe
글쓴이 : 지 기ノ인 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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