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

[스크랩] 대한제국의 마지막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들

채운산 2008. 8. 21. 23:28
1) 순정효황후 윤씨..

순정효황후 윤비는 순종황제의 비다.
서른 셋의 젊의 나이에 과부가 된 그녀는 조성왕조 마지막 중전다운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일제 강점때 옥새를 감춰두고 내놓지 않은 일이며, 6.25전쟁때 낙선재로 쳐들어온 인민군들에게 "이곳은 나라의 어머니가
사는 곳이다"라며 호통쳐서 내쫓은 일하며, 왕조가 무너지고 순종이 승
하한 뒤에도 일제에 항거하며 기어코 낙선재를 지켜낸 그 당당한 기품
등등..
또 공산치하에서 어느 누구 하나 황후라고 돌보아주는 이 없는 혹독한
가난과 고독한 피난살이에서도 황후로서의 자존심을 저버리지 않고 끝내 낙선재를 되찾아 흩어진 왕족들을 기다리던 윤황후였다. 그녀는 이승만 정부와의 끈질기고도 외로운 싸움끝에 끝내 청덕궁 낙선재를 도로 찾아 일본에 있던 영친왕 내외와 덕혜옹주를 불러들일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
였다.
미약하나마 자신의 몫을 다하려했던 조선의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는 1966년 낙선재 석복현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만다.

2)이방자 여사..

장애인의 대모로서의 삶 1901년 11월 4 일 일본 동경에서 나시모또궁가(梨本宮家)의 제1왕녀로 태어난 이여사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속과 절연된 구중 궁궐 속과 같은 황족생활을 통해 곱디고운 모습을 가꾸었다.
1919년 일본왕족들과 귀족들만 다녔던 `학습원'을 졸업한 그는 1920년
4월 28일 일제에 의해 황태자 이은 전하와 숙명의 정략결혼을 함으로써 조선이 제 2의 조국이 된다.

그의 회고록 `세월이여 왕조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사실은 그 전 해부터 내가 일본 황태자비로 물망에 올라 있었다고 한다. 훨씬 후에 안 일이지만, 일본 군벌들의 추악한 세력 다툼이 황태자비 간택에도 끼어들어 나와 이은 전하의 운명에까지 회오리 바람을 일으킨 것이다. 나는 아이를 못나을 체질이라 하여 한.일 융화의 미명아래 은 전하의 배필로 정했다 한다. 내가 아이를 못나으니까 조선에 보내 왕가를 절손시키자는 속셈이렀던 모양이다. 내가 나중에 아들을 낳자 나의 불이설을 주장했던 전의(典醫) 3명이 모두 처형당했다고 한다."

`비운'이라는 수식어로 알려질만큼 `눈물의 여왕'이었던 이여사.
그의 불행 시작은 새 조국에 첫발을 딛던 1921년 부터다. 첫왕자 진왕자가 탄생했으나 일본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한국에서 독살당했고 이어, 1923년 관동대지진의 한국인 대학살로 인해 2개의 조국을 가진 한
여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친정, 조선은 시댁. 어느곳도 공개적으로 편들거나, 비난하거나 할 수 없는 처지였던 이여사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이 자신의 운명만을 슬퍼하며 혼자서 숨이 막히도록 고통을 참아내야 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재일 한국인으로 등록된 그는 1963년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함과 동시에 의식불명 상태로 중태에 빠진 영친왕과 함께 그리던 남편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여사는 이후 영친왕과의 굳은 약속인 장애인을 위한 복지 사업을 추진 25년동안의 생활을 오로지 장애인 복지를 위해 바치게 된다. 1966년 장애인 복지 사업을 위해 사단법인 `자행회'를 창설했으며 이듬해에는 칠궁사당의 창고를 개수하여 15명의 농아와 소아마비 아동지도를 시작했다.

또 다음해 병상에 누워있던 이은 전하의 생신을 기념하여 그의 아호를
따서 사회복지 법인 `명휘원'을 설립했다. 1970년 5월 정성어린 간병에도 불구하고 영친왕이 서거하자 여사는 그 비통한 가슴을 사업으로 달래며 더욱 복지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72년 본격적인 장애아동 교육을 위해 수원에 특수학교인 `자혜학교'를 설립하여 정신박약아 및 신체장애아들의 교육에 헌신했다.

이여사는 부모 및 사회인들의 바른 이해와 관심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함을 절감하면서 관계요인들을 만나 건의하는 한편, 전국 주요도시를 순회하면서 계몽 강연에 나서서 많은 공감과 호응으로 복지의식의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장애인 국제기능 경진대회나 장애인 올림픽등에 출전, 금메달을 획득하여 장애인들을 고무시키는데 앞장섰으며 국민들로 하여금 `신체의 장애는 능력의 장애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당시만해도 지금처럼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사업활동이 범사회적으로 인식되거나 지원받지 못한 때였다. 70년대 이여사는 스위스, 이태리, 독일, 불란서 등 국내.외 순회 `궁중의상 발표회'를 하는 한편 다방면의 예술적 재능을 엿볼 수 있는 그림. 붓글씨. 칠보공예등을 제작, 작품을 팔아 기금확충을 하는 등 장애사업을 위해 헌신했다.
이방자여사의 생활규범 및 정신세계는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몰락한 한 나라의 왕비로서의 자존을 지탱케 하면서 소외된 농아. 소아마비 등의
아동들을 위해 전환한데 대해 크게 주목할만 하다.

그의 공로가 널리 인정되어 정부는 서울시 문화상. 대한적십자상. 국민훈장모란장. 5.16 민족상.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했다. 서거후 그 유지에 따라 장애인 재활시설인 수봉재활원이 설립되었다.

이여사는 지난 83년 독일에서 궁중의상 발표회 당시 과로로 인한 신병악화로 투병하다가 89세를 일기로 1989년 4월 30일 서거했다. 그의 시신은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영릉에 영친왕과 함께 합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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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구와 줄리아 리..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외아들로서 조선 마지막 왕세손이었던 이구..
그리고 그와 사랑에 빠진 연상의 서양여자 줄리아 리..

▲이구와 줄리아의 비극적인 사랑..

▶기울어진 왕가의 마지막 왕자와 연상의 서양여자의 만남과 결혼

뉴욕의 한 건축회사에서 근무하던 줄리아. 스페인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그녀 앞에 동양신사가 나타난다. 그 동양신사는 다름 아닌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 영왕의 외아들인 이구. 그의 설득에 줄리아는 스페인 행을 포기하게 되고 가난한 왕자 이구와 결혼을 하게 된다.

▶이별, 그 후..

이국의 여인이라는 이유로 줄리아는 종친회의 냉대를 받고 이구는 계속되는 주위의 압력과 권유를 받아 파경을 맞이하게 되는데…. 그 후 줄리아는 사회 복지사업과 장애인 직업교육 활동을 펼쳤으며 연상의 서양여자와 결혼했다가 왕실의 품위를 그르쳤다는 질타를 받던 이구는 오랜 세월 이국을 떠돌았다. ..
출처 : 왕실과 황실의 역사▶역사지식Cafe
글쓴이 : ♧.仁 賢.♧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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