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령당 양 귀인 태생인 고종의 막내딸 덕혜옹주는 일본의 심한간섭 때문에 왕가의 적에도 오르지 못하고 일본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고독한 만년의 유일무이한 낙이 되었던 옹주이기에 고종의 일본에 대한 불만은 이만저만 크지 않았다.
그러니까 한국왕실을 일본국 왕통의 관례에 따라 규제하느냐 안 하느냐의 시험대에 덕혜옹주의 입적문제가 맨 처음 오르게 된 셈이었다. 이 문제는 어느 한 소녀의 신분에 관한 문제를 넘어서, 민족적 긍지에 관한 중대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입적문제는 옹주가 여섯 살나던 해까지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차일피일 미루어 왔다. 고종은 드디어 눈물작전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데라우치 총독이 덕수궁에 들렀다. 고종은 의례적인 인사를 치른 다음, 총독에게 은근히 운을 뗐다.
"총독에게도 애가 있기에 하는 말인데, 아이란 귀엽기 그지없는 것이라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어 백성을 자기 자식처럼 귀여워하라는 말이 세삼 가슴을 친다느니, 천진난만하게 노는 아이들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사회의 속악이란 속악이 절로 순환된다느니, 늙으면 아이로 되돌아간다느니. 내 여생은 정녕 어린아이로 돌아가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일밖에 낙이 있을 것 같지 않다느니 하는 말들을 한 마디 한 마디 다짐을 놓듯 이어 나갔다. 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만든 것은 덕혜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종 스스로 원생이 되어 여생을 보내기 위함이라고도 했다.
덕혜가 자라자 고종은 덕수궁 별당에 유치원을 만들고, 덕혜를 비롯한 같은 또래의 근친 어린이 십여명을 원생으로 데려다 놀게했다.
"나의 유치원 생활을 한번 보지 않겠느냐."
고종은 데라우치를 직접 즉조당에 마련된 유치원으로 안내했다.
넉넉한 볼에 하얀 수염을 드리운 고종과 군복에 대검을 찬 으리으리한 풍채의 데라우치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자, 십여명의 원생들이 쿄구치라는 일본인 보모 손에 이끌려 나왔다. 아이들은 고종과 데라우치 앞에 일본식 큰절을 올린 뒤, 일본 노래 '하토뽀뽀'를 부르며 유희를 했다.
데라우치는 일본인 보모에 일본식 인사, 일본 신발인 게다에 또 일본노래까지 부르게 한 고종의 계략에 그만 말려들고 말았다.
궁전이 이토록 일본 정책에 동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데라우치의 정치적 자부심과 또 그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기에 너무나도 충분했던 것이다. 데라우치의 만족스런 모습을 보자, 고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원아들과 어울려 유희를 했다.
군복에 머리는 벗겨지고 눈초리가 위로 째진 무서운 몰골의 데라우치도 그만 흥에 이끌려 쇳소리를 내면서 고종과 함께 유희를 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어느 일본인 사무관은 다음과 같이 그떄의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기록에 남겨놓고 있다.
『어린이들은 데라우치가 접근하면 울면서 도망쳤다. 그럴때마다 고종은 유희를 하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유희가 끝나자 그 중 한 소녀를 품에 안고 자리로 돌아와서 데라우치에게 절을 시켰다.
"이 아이가 내 딸이며 덕수궁의 웃음은 이 아이로부터 피어나고 있다."
덕혜가 조선식 큰절을 하려 드니까, 고종은 덕혜에게 넌지시 일렀다.
"이 분은 일본의 높으신 어르신네니 새절(일본 절)을 해야지."
물론 고종은 덕혜의 입적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요컨데 그것이 고종의 계략이라면 계략이었다.
한데 아니나 다를까. 총독 관저로 돌아온 데라우치는 측근에게 대뜸 다음과 같이 내밷었다.
"오늘은 덕수궁(고종)전하께 톡톡히 당했어. 패자는 패자다워야 하는 것이 우리 무사도가 아닌가."
그리고 즉시 일본 궁내성에 덕혜의 입적문제야 말로 궁에 대한 정략에 필요 불가결하다는 요지의 비밀서한을 띄었다.
얼마 후, 덕혜는 고종의 계략대로 옹주로써 왕적에 입적되었다.
그러니까 한국왕실을 일본국 왕통의 관례에 따라 규제하느냐 안 하느냐의 시험대에 덕혜옹주의 입적문제가 맨 처음 오르게 된 셈이었다. 이 문제는 어느 한 소녀의 신분에 관한 문제를 넘어서, 민족적 긍지에 관한 중대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입적문제는 옹주가 여섯 살나던 해까지 해결을 보지 못한 채 차일피일 미루어 왔다. 고종은 드디어 눈물작전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어느 날 데라우치 총독이 덕수궁에 들렀다. 고종은 의례적인 인사를 치른 다음, 총독에게 은근히 운을 뗐다.
"총독에게도 애가 있기에 하는 말인데, 아이란 귀엽기 그지없는 것이라오."
그러고는 다시 입을 열어 백성을 자기 자식처럼 귀여워하라는 말이 세삼 가슴을 친다느니, 천진난만하게 노는 아이들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사회의 속악이란 속악이 절로 순환된다느니, 늙으면 아이로 되돌아간다느니. 내 여생은 정녕 어린아이로 돌아가 아이들과 함께 지내는 일밖에 낙이 있을 것 같지 않다느니 하는 말들을 한 마디 한 마디 다짐을 놓듯 이어 나갔다. 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만든 것은 덕혜를 위해서가 아니라 고종 스스로 원생이 되어 여생을 보내기 위함이라고도 했다.
덕혜가 자라자 고종은 덕수궁 별당에 유치원을 만들고, 덕혜를 비롯한 같은 또래의 근친 어린이 십여명을 원생으로 데려다 놀게했다.
"나의 유치원 생활을 한번 보지 않겠느냐."
고종은 데라우치를 직접 즉조당에 마련된 유치원으로 안내했다.
넉넉한 볼에 하얀 수염을 드리운 고종과 군복에 대검을 찬 으리으리한 풍채의 데라우치가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자, 십여명의 원생들이 쿄구치라는 일본인 보모 손에 이끌려 나왔다. 아이들은 고종과 데라우치 앞에 일본식 큰절을 올린 뒤, 일본 노래 '하토뽀뽀'를 부르며 유희를 했다.
데라우치는 일본인 보모에 일본식 인사, 일본 신발인 게다에 또 일본노래까지 부르게 한 고종의 계략에 그만 말려들고 말았다.
궁전이 이토록 일본 정책에 동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데라우치의 정치적 자부심과 또 그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기에 너무나도 충분했던 것이다. 데라우치의 만족스런 모습을 보자, 고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원아들과 어울려 유희를 했다.
군복에 머리는 벗겨지고 눈초리가 위로 째진 무서운 몰골의 데라우치도 그만 흥에 이끌려 쇳소리를 내면서 고종과 함께 유희를 하기 시작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어느 일본인 사무관은 다음과 같이 그떄의 어처구니없는 광경을 기록에 남겨놓고 있다.
『어린이들은 데라우치가 접근하면 울면서 도망쳤다. 그럴때마다 고종은 유희를 하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유희가 끝나자 그 중 한 소녀를 품에 안고 자리로 돌아와서 데라우치에게 절을 시켰다.
"이 아이가 내 딸이며 덕수궁의 웃음은 이 아이로부터 피어나고 있다."
덕혜가 조선식 큰절을 하려 드니까, 고종은 덕혜에게 넌지시 일렀다.
"이 분은 일본의 높으신 어르신네니 새절(일본 절)을 해야지."
물론 고종은 덕혜의 입적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요컨데 그것이 고종의 계략이라면 계략이었다.
한데 아니나 다를까. 총독 관저로 돌아온 데라우치는 측근에게 대뜸 다음과 같이 내밷었다.
"오늘은 덕수궁(고종)전하께 톡톡히 당했어. 패자는 패자다워야 하는 것이 우리 무사도가 아닌가."
그리고 즉시 일본 궁내성에 덕혜의 입적문제야 말로 궁에 대한 정략에 필요 불가결하다는 요지의 비밀서한을 띄었다.
얼마 후, 덕혜는 고종의 계략대로 옹주로써 왕적에 입적되었다.
출처 : 왕실과 황실의 역사▶역사지식Cafe
글쓴이 : ♧.仁 賢.♧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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