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고종에 대해 몇 가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어리석은 군주요, 엄한 아버지와 명석한 왕비 앞에서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지 못한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는 군주라는 것 등등이다.
이는 일제 식민사가들의 의도적인 덧칠과 이를 확대 재생산해 온 국내 사가들, 또 그로 인해 대원군과 황후의 정치적 갈등관계를 주요 소재로 활용해 온 문화계의 영향 때문으로 보인다. 요즘은 고종에 대한 재평가의 논의가 무르익는 속에서 고종에 대한 이러한 관념도 어느 정도 희석되어 가는 듯하다.
고종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 속에서 최근 밝혀진 것은, 고종이 개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고 개화서적을 수집하여 독서를 장려하기도한 군주였다는 사실이다. 고종이 어떻게 개화서적을 수집하고 어느 계층에 독서를 권장하였는지, 그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하는 문제는 일단 접어두기로 한다.
여기서는 고종이 개화군주로 알려진 군주답게, 친정 이전 10년간의 강학기 동안 진행된 왕도수업에서도 남다른 열정과 끈기를 가지고 임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왕이 되기엔 미흡했던 가문의 정통성
고종이 즉위 후 바로 정치일선에 나서지 못하고 왕도수업을 체계적으로 받아야 했던 이유는 12세라는 어린 나이도 문제였지만, 그의 왕가로서의 혈통과도 관계가 있다. 고종의 인생 가운데서 가장 드라마틱했던 것은 아버지를 국왕으로 두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일반이 아는 상식으로 대개 국왕이 되는 길은 선왕의 적장자 내지는 선왕의 혈통 가운데 적임자가 왕세자로 책봉된 후 왕도수업을 체계적으로 받아 나가는 것이다. 물론 세조나 중종, 인조 등의 경우처럼 왕세자로 책봉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오르게 된 사례도 더러 있지만, 모두 왕실직계로서 그에 따른 교육을 이미 받아온 상태였다.
그러나 고종의 경우에는 왕족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먼 방계혈족에 해당된다. 고종의 가계를 살펴보면, 사도세자가 두 번째 궁녀에게서 얻은 세 아들 가운데 둘째인 은신군이 후사없이 죽자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 구(球)가 은신군의 가계를 계승하면서 왕실의 친족이 되었다.
그런데 당시 남연군의 할아버지가 왕실 친족에게 금지되어 있던 참판 등의 벼슬을 했던 사실을 들어 고종의 가계는 왕실 종친의 범위에서 벗어나 있었다고 보는 것이 그동안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듯 왕실의 먼 혈족에 불과하였던 고종의 왕위승계는 어떻게 전격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통상적으로 선왕이 사망하고 왕세자도 없는 경우, 왕위승계를 결정짓는 권한은 대궐에서 가장 연로한 사람에게 있었다. 따라서 당시 대왕대비인 신정왕후 조씨는 이미 승하한 익종(효명세자)의 비로서 왕실에서 제일 연로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중심이 되어 왕위승계를 결정짓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순조 이후 즉위한 어린 왕들을 대리하여 안동김씨들이 세도정치를 자행하는데 따른 풍양조씨로서의 위기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고종의 왕위승계를 조대비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포석으로 활용하였을 것이라는 논리이다. 이는 곧 고종이 철종이 아닌 익종의 대통을 잇는 것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다.
성덕군주로 거듭나야 한다는 부담감
고종이 익종의 직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왕좌에 오른 것은 곧 정통성 시비에 휘말릴 소지가 있었다. 이는 본인에게는 물론 흥선대원군과 조대비 모두에게 상당한 부담이 따르는 일이었다.
더욱이 조선 왕실은 역대로 국왕의 정치적 능력 외에도 경연과 서연을 통한 학문과 덕성을 함양하는 일을 중시하였다. 학문을 닦는 일은 당시의 시대사상이었던 위정척사사상에 입각하여 사도(邪道)를 막고 정도(正道)를 밝히기 위한 일차적인 수순으로 여겨졌다. 때에 따라 지독한 가뭄이나 홍수 등의 원인으로 왕의 실덕과 실정을 거론하는 것도 당시의 관례였다.
결국 이 모든 것은 국왕의 도덕적 수준과 직결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왕이 된 자들은 성덕군주가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클 수밖에 없었다. 고종으로서는 왕이 되기엔 미흡한 정통성을 성덕군주가 됨으로써 해소해 가야 하는 이중의 부담을 안고 궁궐생활을 시작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진 1) 개화군주로 알려진 면모와는 달리 친정 이전 10년 동안 왕도수업에 대한 중압감으로 번민의 나날을 보낸 고종.
그렇다면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의 학문적 성숙도는 어느 정도였을까? 고종이 사가(私家)에 머무를 때 기본적인 유교 경서는 학습을 하고 있었을 테지만, 그의 학업 수준을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 『승정원일기』에는 고종이 삼경ㆍ오경 등의 범위와 경서제목을 익혀야 할 정도로 학문이 매우 일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사실로 해석한다면 하늘을 찌를 듯한 안동김씨 세도가들의 눈에 국왕이 일개 하찮은 존재로 보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고종을 상대로 체계적인 강학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연유에서였다.
곧 국왕 된 자로서의 학문연마와 덕성함양이라는 기치 아래 고종에 대한 권강이 시작되었다. 권강은 주로 규장각의 각신과 제학을 역임했던 인물들이 강관이 되어 담당한 것으로 형식과 절차를 간소화한 것이었다. 정식 경연을 하기에는 고종의 나이가 어려 강독이 곤란하였기 때문에 권강례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권강 외에도 고종은 소대의 형식을 통해 하루에 몇 차례씩이라도 원하는 대로 학문을 연마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때부터 고종은 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고 친정을 하는 1873년 말에 이르기까지 강학기를 갖게 되었다. 물론 학문연마는 국왕 재위시기 내내 계속되지만 친정 이전 10년간은 정치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12살 이후부터 22살이 될 때까지 오로지 성덕군자가 되기 위한 학문을 습득하면서 보냈던 것이다.
강학을 처음 시작할 무렵 고종의 학업을 담당한 강관들은 정조의 1백권이 넘는『홍재전서』를 본보기로 들면서 선왕들 중에서도 특히 정조의 학문연구 태도를 본받을 것을 주문하였다. 동지돈녕부사 기정진(奇正鎭)의 경우에는 역대 중국 선왕들의 치적을 예로 들며 “위나라 무공처럼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게, 문공처럼 검소함을 생활화 하도록” 충언하였다.
이처럼 학문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역사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성덕군주가 될 것을 요구하는 여러 신료들로 인해 고종은 더더욱 정신적 압박과 부담 속에서 강학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면 고종의 강학 태도는 어떠했을까?
사서류를 통해 선왕의 경험을 공유하다
강학 초기의 고종은 비교적 열심히 공부하였고 학문 연마는 후일로 미뤄서는 안된다는 자세로 임하였다. 왕도수련의 과정을 통해서 고종은 차츰 통치의 규범과 위민정치를 위한 대체적인 내용도 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고종이 처음 강학 교재로 삼은 것은『소학』과『효경』, 사서삼경의 경전류였다. 역대 군왕의 정치적 전범을 익히기 위한 책으로『통감』과『국조보감』등도 공부하였다. 이러한 사서류는 역대 왕조의 치란과 흥망성쇠가 실려 있어 본받고 경계할 점이 많았다. 따라서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기본윤리를 강조하는 유교경서들 못지않게 중시되고 있었다.
(사진 2) 평복을 입고 있는 고종의 모습
고종은 특히 옛날 왕조의 역사와 관련한 이야기가 들어있어 싫증이 나지 않는 사서들을 선호하였고 강관들은 역사를 통해 현실정치에 대한 감각을 익히게 하기 위해 사서류를 권하였다. 고종이『통감』을 강독하면서도 소대의 형식을 빌려 31살까지 틈틈이 다시 학습한 것을 보면 특별히 사서류에 심취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국조보감』역시 역대 군왕들의 치적에서 귀감이 될만한 사실들을 엮어놓은 책이다. 고종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겪은 후인 1886년에 이 책의 강독을 시작하였다. 혼란한 시기에 사서를 통해 선왕들의 경험을 빌리려 했던 고종의 자세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왕도수업의 중압감
그러면 고종이 수학한 교재와 학문의 깊이는 어느 정도였을까? 역대 군왕들의 진강책자 순서를 기록한『열성조계강책자차제(列聖朝繼講冊子次第)』를 보면 고종은 역사적으로 학문에 뛰어난 열정을 보였던 세종, 영조, 정조 등의 국왕들과 비교되는 측면이 있다.
이를테면 세 왕들의 경우 전체적으로 강학한 시기가 길 뿐 아니라 수학한 교재도 훨씬 더 다양했다. 고종을 비롯한 대부분의 왕들이『소학』과『효경』을 시작으로 사서삼경과『동몽선습』『국조보감』등을 수학하는데 그친 반면, 세 국왕은 이 외에도『성학집요』『동국통감』『주자어류』『자치통감』등 정치의 모범이 될만한 중국의 역사서나 수준 높은 유학의 경전들까지 학습하였다.
따라서 학문에 열정적이었던 국왕들에 비해 고종의 강학 기간이 결코 길었다거나 학습의 수준과 내용이 깊이가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구태여 해석한다면 평균적인 수준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종의 학습 태도는 강학에 열중해야 하는 당위성을 역설하는 신하들의 요구만큼 매순간 진지하였을까? 고종은 낭청 아래에 비둘기 집을 두고 감상하다가 강관 강노(姜㳣)에게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행위를 한다”며 질책을 받은 일이 있을 정도로 마음이 여리고 완상하는 취미가 있었다.
또한 심한 경우, 여름에는 덥다는 이유로 두 달 동안 강학을 폐하고, 겨울에는 춥다는 이유로 강학을 하지 않기도 하였다. 그러다보니 경우에 따라서는 일년에 강학하는 날을 통합하여 3·4개월에 지나지 않은 적도 있었다.
고종이 강학하던 시기는 서양이 조선을 상대로 문호개방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 때였다. 대원군의 지휘 하에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고 있었던 시기이니만큼 결코 태평성대라고 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고종의 이러한 강학태도에 대해 대소신료들의 질책이 잇따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우의정 홍순목(洪淳穆)이 “서양오랑캐를 퇴치하는 데에는 조선이 군주를 중심으로 성덕을 높임으로써 오랑캐로 하여금 사모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우러나게 하는 길 뿐” 이라며 경고성 발언을 한 것도 당시의 위기의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개화군주의 면모와는 다른 평균적인 학문수준
이처럼 강학기의 고종은 왕도수업을 받으면서 10대의 청소년으로서는 매우 버거워 보일 수도 있는 유교적 도학정치의 이념과 군주로서의 제반 소양을 연마하려 애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보통의 성장기 청소년들에게서 보이는 공상과 망상에 사로잡히기, 또 그로 인한 학습능률의 저하와 학업을 기피하는 양태도 보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여기에는 물론 왕도수업을 감당해야 하는 심적인 스트레스 탓도 있었지만, 그 즈음에 한창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첫사랑에 대한 갈등 탓도 있었던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고종은 1866년 명성황후와 가례를 올렸으나 황후가 아닌 궁녀 이씨에게 먼저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1868년에는 영보당 이씨에게서 출생한 완화군(完和君) 선(墡)을 사이에 두고 두 여인 간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다툼이 전개되었다. 더욱이 흥선대원군은 완화군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후일의 세자감으로 미리 점치고 있었다. 모두가 고종과 명성황후와의 사이에 왕자 척(坧)이 태어나기도 전에 생긴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황현의『매천야록』에 세력이 불리했던 황후가 영보당 이씨와 완화군을 대궐 밖으로 내보내 정적을 제거함으로써 일의 매듭이 지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일의 여파라고 할 수는 없지만 황후는 가례를 올린 후 수년간 고종의 사랑을 얻지 못하였으니 황후도, 고종도 신혼 초기에는 평탄한 부부생활을 영위하지 못했던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고종의 강학기는 왕도수업의 중압감과 그를 둘러싼 두 여인의 질투와 욕망의 독기로 부분적으로는 어둡고 침울한 시기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고종이 가끔 작고 예쁘장한 것들에 미혹되고 학업에 집중하지 못해 진도가 느리다고 질책을 당했던 이유는 그로 하여금 사사로운 상념에 젖게 만드는 이러한 환경적 요인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경서제목을 익혀야 할 정도로 일천한 지식 수준의 고종에게 있어서 심오한 철학적 은유까지 분석해야 하는 유교경전의 학습은, 자기 자신은 물론 외부로부터 제기되는 견디기 어려운 중압감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는 학습 부진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고 결국 학덕을 많이 쌓은 선왕들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하는 평범한 군주로 남게 되었다.
이는 고종이 강학기를 거치면서 중국을 다녀온 연행사들을 통해 세계정세에 관심을 기울이고, 영선사와 수신사를 통해 수집한 개화서적을 자신은 물론 규장각 관원들에게까지 널리 읽히게 한, 지금껏 개화군주로 알려진 면모와는 또 다른 이면의 모습이라 하겠다.
출처 http://www.koreanhisto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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