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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종황제의 외동 따님 덕혜옹주(德惠翁主)

채운산 2008. 8. 21. 22:53
[고종황제의 외동 따님 덕혜옹주(德惠翁主) ]


  덕혜옹주는 고종께서 마지막으로 보신 외동 따님이십니다.
1912년 5월 25일에 태어나셨습니다.
그를 낳은 생모는 양씨(梁氏)로써 복녕당(福寧堂)이란 당호(堂號)를 갖고 있습니다.
이때 고종께서는 명성황후 이후 맞아들이셨던 엄비(嚴妃)를 저 세상으로 보내신 지 1년 뒤였습니다. 그런데 궁인 양씨를 통하여 이처럼 예쁜 따님을 보신 것입니다.
  덕혜옹주가 태어난 지 2개월 후인 7월 12일에 아예 아기를 유모를 딸려서 왕의 침전인 함녕전(咸寧殿)으로 옮겨오게 할 정도로 왕께서는 옹주의 귀애하는 모습이 대단하였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입니다. 
고종은 이미 순종과, 의친왕(義親王), 영친왕(英親王)의 3형제를 두셨으나 생존하여 있는 따님으로서는 덕혜옹주가 처음이었으므로 이처럼 옹주를 편애하고 지극한 정성을 보임은 측근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감읍의 눈물을 자아내게 할 정도였었다고 합니다.
고종은 옹주의 생탄(生誕)이 이번이 그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명성황후께서 낳으신 공주와, 내안당(內安堂) 이씨가 낳은 딸까지 합하면 모두 세 분의 따님을 얻으신 것이 되나, 모두 한 살도 채 되기 전에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네 번째로 태어난 덕혜옹주야 말로 금지옥엽이 되신 것이죠.
고종께서는 언제나 덕혜옹주를 무릎 위에 앉혀놓으시고 옥좌(玉座)에 앉으셔서 궁인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 이 아기를 좀 보려므나. 손을 좀 만져보아라."
말씀이 계시면 궁인들은 소위 "저희들이 어찌 아기씨의 손을 만져볼 수 있겠사옵니까."
하고 피하면 고종은 그래도 궂이 궁인들에게 아기의 토실토실한 손목을 쥐어보게 하셨답니다. 이렇게 전하는 것은 이미 돌아가신 김명길(金命吉) 상궁의 말씀이셨는데, 아울러서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들려주셨습니다.
"금지옥엽(金枝玉葉)의 왕녀 님이라 하지만, 덕혜옹주는 부왕(父王)께는 세상에 다시없을 듯이 무척 사랑을 받으셨죠. 유모도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아마 임금님의 앞에서 들어 누울 수 있었던 사람은 아마 변(邊) 유모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변 유모의 본 이름은 변복동(邊福童)입니다. 
이 유모는 원래 남편 되는 분이 있는 사람으로 그녀가 다행스럽게도 귀하디 귀한 왕녀의 유모로 발탁이 되어 궁으로 들어오게 되었을 때 그녀가 앞으로 집안 살림을 보살필 수 없을 것을 지레 알고서 남편에게 다른 여인 한 사람을 붙여주고 입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모가 아기씨에게 젖을 물리고 재우고 있을 때에 그것을 알지 못하시고 아기를 보려오셨던 왕께서 이 광경을 보시고는 얼른 몸을 뒤로 돌리시고, 유모는 기급을 하여 몸을 돌쳐 일어나려 하면 왕께서는 오히려 유모에게,
"아니다. 아기가 자다가 깨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괜찮다. 그대로 누워있거라."
하시면서 물러가셨다고 합니다.
덕혜옹주를 낳으신 분은 양씨(梁氏)라고 하는 분임은 잠깐 앞에서도 밝혔거니와 그녀가 궁인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의 친정 오라버니는 큰 부잣집을 상대로 하여 쇠고기를 대어주는 행상의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양씨가 입궁하여 왕으로부터 승은을 입어 어여쁜 옹주를 낳았으니 그 오라비 되는 사람의 거들먹거리면서 젠체하는 허세꾼이 되었는 바, 그가 바로 덕혜옹주의 외삼촌이 되는 사람입니다. 
일개 고깃 근이나 받아다가 집집마다 쇠고기나 날아다 주었던 그가 하루 아침에 누이 하나 잘 둔 탓으로 당상관의 조복(朝服)을 척 걸쳐 입고 덕수궁의 정문을 제 마음대로 호기 있게 드나드는 팔자가 될 줄이야 어느 누구가 알았겠습니까?
덕혜옹주는 크면서 이 삼촌을 그렇게 잘 따랐다고 하는데, 보모상궁(保姆尙宮)의 말에 따르면,
" 우리 아기씨가 얼마나 영특하신지, 글쎄 친 외삼촌이 들어오시면 
< 양상관(梁上官)이가 온다> 하시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니, 쇤네가 옹주아기씨께, <그럼, 아기씨의 외가댁은 어디시오니까?> 물으면 <죽동(竹洞)!>하시질 않겠어요?"
여기서 죽동은 옛 명성황후의 친정 집 동생인 민영익(閔泳翊)이 살고 있는 살고 있는 집을 가리킵니다. 어느 사람이 옹주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었는지는 알지 못해도 서녀(庶女)의 입장에서 적모(嫡母)의 친정을 옹주의 외가라고 알게 하려는 배려에서 나온 말인 것 같습니다

고종께서는 울분과 실의(失意)의 나날 속에서 덕혜옹주의 재롱을 보시는 것으로 위안을 얻으시고 어느 듯 덕혜옹주가 5살이 되자 덕수궁 안에 즉조당(卽祚當)이라고 하는 어린이 유치원을 차려주셨습니다. 
<한국교육사(韓國敎育史)>=韓彦基 著=에도 언급되어 있는 것과 같이 이 즉조당이야 말로 한국에서의 유치원으로는 효시(嚆矢)를 삼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보모(褓母)는 일본인 "경구(京口)"라는 여인을 두고, 또 한 사람의 한국 여성을 두었는데 덕혜옹주와 같이 놀아주고 노래와 유희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은 나이가 모두 덕혜옹주 또래들로서 당시 명문 귀족의 딸들 10여 명이 그 전부였습니다. 
고종께서는 언제나 덕혜옹주가 보고 싶으시면 즉조당으로 납시어 옹주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뛰어 노는 모습을 보시고 저녁 땅거미 질 무렵에는 옹주를 들어 안으시고는 내전으로 듭시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고종께서는 한 가지의 고민이 계셨습니다. 그것은 옹주가 지금 5살의 나이가 되도록 옹주의 호(號)를 지어주지 못하신 바로 그것이었는데, 이 사실 자체가 정말로 그러했언던가의 여부는 알 길이 없으나마 총독부의 간섭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총독부는 조선 왕족의 수를 더 이상 늘리지 않기 위한 술책의 하나로서 그와 같이 음험한 정책을 써왔었기 때문에 고종은 이제 조선의 국왕도 아닐뿐더러 빼앗긴 국가의 일개 존칭 만으로서의 '왕'이었기 때문에 총독부의 지시를 아니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고종께서는 옹주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위한 한 가지의 좋은 생각 한 가지를 떠올리셨습니다. 그것이 잘 성사된다면 옹주를 정식으로 왕가의 계보에 입적을 시킬 수사 있을 것이며, 그래야 옹주의 호도 만들어 줄 수가 있겠으므로 기회를 찾고 있었던 차에, 어느 하루 총독 데라우찌(寺內正毅)가 고종께 문후(問候)를 드릴려고 덕수궁으로 입내(入內)하였을 때 고종께서는 총독에게 자연스럽게,
"어린애들은 참 천진스럽고 귀여운 것이 아니겠소? 요즈음 궁내에 어린애들을 모아놓고 뛰어 놀 수 있는 유치원 하나를 창설하였더니, 그 애들이 찾아와서 맘껏 뛰어 놀고 재롱들을 떠는 걸 보니 세상의 온갖 속악(俗惡)한 것들을 일순간에 잊을 수가 있는 것 같았소."
말씀하시니, 총독도 따라서, 고종께,
" 예, 폐하의 말씀이 옳으신 것 같습니다. 소인도 어린아이들을 매우 좋아합니다."
하였습니다. 고종께서는 다시 그에게,
"그럼, 오늘 어디 유치원 구경을 한 번 해보고 가시지 않으시려오? 총독도 정무(政務)에 시달리시느라고 노고가 많으실 텐데, 잠시동안 머리를 좀 식히고 가시구려,"
말씀하시고 고종께서 먼저 행보(行步)를 띄셨습니다. 고종은 함녕전(咸寧殿)을 나오셔서 유치원이 있는 즉조당으로 앞장을 서서 가셨습니다. 이때 유치원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노래들을 부르고 있었는데 그처럼 재롱을 떨며 고개를 좌우로 갸웃둥 하면서 노래부르고 있는 아이들의 애 띈 모습에, 총독은 자신도 모르게 취해 있었습니다.
노래가 다 끝나고 난 뒤 총독은 아이들 앞으로 걸어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도 주고 정감 어린 듯한 말로 아이들의 이름도 묻고 미소도 지어 보이니깐 아이들은 천진스럽게 총독의 팔에 안기는가 하면, 품속까지 파고드는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고종께서 한 어린아이를 덤썩 들어올리시더니, 옆에 있는 데라우찌 총독에게,
"바로 이 아이가 내 귀여운 딸이라오. 나는 이 애가 있어서 하루 하루가 즐겁다 오. 이제 내 만년의 즐거움은 모두 이 애로부터 나오는구려."
하시면서 희색이 만면하신 표정을 지어 보이셨습니다.
총독은 짐짓, 반색을 하면서, 얼른 옹주를 고종으로부터 받으시고,
" 아아, 폐하께옵서 이렇게 아름다운 따님을 두고 계셨습니까?"
하고, 곧바로 옆의 수행 직원에게,
"지금 폐하께옵서 이처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을 나에게 보여주시면서 말씀을 하시니, 아무리 누가 뭐라 했든지 간에 먼저 내렸었던 지령문을 취소하여야겠다."
면서 조선 왕궁 내의 소생왕자나, 공주, 옹주의 명칭을 일체 쓰지 못하게 하였던 총독부령을 일시에 걷우어 드리도록 명령을 즉석에서 내렸던 것입니다. 이로써 옹주는 입적(入籍)이 되어 일본정부가 인정하는 조선 왕족의 일원으로서 왕족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덕혜옹주의 덕수궁 유치원 시절의 생활은 이후 아무 탈 없이 자나가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더 덕혜옹주 유치원 시절의 이야기를 김 상궁을 통해서 들은 바대로 전개한다면 이렇습니다. 

즉조당 건물은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2층으로 된 목조건물입니다.
즉조당 유치원은 덕혜옹주를 위해서 차려진 유치원으로서 귀족의 딸
10여 명이 덕혜옹주의 친구가 되어 소꿉놀이도 하고, 손잡고 뛰어 놀면서 하루 하루를 즐겁게 지냈습니다.
즉조당 유치원에 풍금 한 대가 들어왔습니다. 아주 새 것입니다. 먼저 썼던 것은 어느 예배당에 있던 것을 잠간 가져다 썼던 것인데, 이번에 아주 새 것으로 풍금 한 대가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조선에도 동요가 많습니다. 일본 동요도 들여다가 조선 동요 가르칠 때, 일본의 동요도 함께 가르쳐주었습니다.
이렇게 10여 명의 원아(園兒)들 가운데 덕혜옹주가 가장 나이가 어렸습니다. 이때 옹주의 나이는 6세였습니다.
당시 옹주와 함께 원생이었던 민덕임(閔德任) 여사는 그 당시를 떠올리면서 덕혜옹주가 그 어린 나이임에도 불고하고, 생김새와 똑같이 매우 점잖고 의젓하였다고 합니다. 원생들이 비록 나이가 옹주보다는 한 두 살 위이기는 하였지만 옹주에게는 깍듯이 '아가씨'라 불렀고, 존대어로 '그랬습니다.'라는 공대(恭待)를 받는 것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옹주는 그 친구들에게, 의례껏 하대(下待)를 하였다고 하는데, '응, 그랬냐?' 또는 '~해라' 하는 식으로 말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느 때 원생 중 한 아이가 오줌을 가리지 못하고 그만 치마 입은 채로 그 자리에서 쌌더랍니다. 이 아이는 옹주가 훌훌 벗어준 그 옷을 입고 집으로 돌아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옹주는 이렇게 인정도 많고 친구아이들과 우애가 매우 깊었었던 것이죠.
원생들 가운데에는 대부분이 종실과 척족(戚族) 민씨의 딸들이 많았었는데 그 아이들은 일본 기모노 옷을 입고 머리에는 꽃 리본을 단 채로 나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중 한 아이는 전에 농상공부대신을 지낸 조중응(趙重應)과 같이 살고 있는 일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아이가 있었는데, 그 일본부인은 광강죽자(光岡竹子)라 하여 조중응에게 오기 전에 일본 동경에서 모 출판사 사장의 부인이었었답니다. 사장이 죽자 과부로 있다가 망명 왔던 조중응과 붙어살면서 부부가 된 것입니다. 조중응은 일본으로 몸을 피하여 와있으면서 동경외국어대학교에서 한국어 강의를 맡아하게 되었는데 바로 여기서 광강죽자와 만나 정분을 맺은 것이었습니다.
조중응이 몸이 풀리어 다시 조선으로 건너간 이후 그가 농상공부대신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녀는 급히 서둘러서 간단한 옷가지 몇 점만을 가방에 넣은 채 불야 살야 조선 땅으로 건너왔던 겁니다.
그러나 조중응에게는 본 부인이 있었을 뿐더러 결국 그 여인은 조선 땅에서 발붙일 데를 잃고 길거리를 방황하는 가련한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조중응이 이 여인의 난처한 꼴이 되어 있을 곳을 찾지 못하여 거리를 헤매고 다닌다는 소식을 들은 조중응은 고종 황제에게 그 딱한 사정을 품해 올리니, 황제께서 서로 어려운 때에 만난 두 사람이었으니, 그대로 둘 수는 없다고 하시면서 본 부인을 우 부인(右夫人)으로 하고, 일본 부인을 좌 부인(左夫人)으로 하랍시라는 어명이 내려진 것입니다.
덕혜옹주에게는 이처럼 천진난만한 시절도 잠깐 8살이 되었을 때에 고종이 돌아가심으로 인하여 그로부터 덕혜옹주 비운(悲運)의 시대가 다가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고종은 영친왕이 일본으로 인질이나 다름없는 일본황실의 술책으로 일본 귀족의 딸과 결혼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는가 하면 이와 비슷한 일이 아직 나이 어린 덕혜옹주에게 까지 돌발적으로 닥치지 말라는 법도 없지는 않을 것 같아서 고종은 덕혜옹주를 일찍 약혼을 하여 그 사실을 널리 공표 함으로써 영친왕과 같은 억울한 경우를 면해보려고 김황진(金璜鎭)이란 시종(侍從)을 불러들여,
" 경에게 아들이 있는가?"
하문(下問)하시니, 
"신에게는 딸자식 하나가 있사 올뿐입니다."
"그럼, 조카는 있는가?"
"예, 신에게 아우가 여럿 있어서 조카아이들은 많사옵니다."
"그렇다면, 경의 조카 한 사람을 내어 놓으라."
명령하시므로 김 시종은 자기의 아랫 아우의 아들을 천거(薦擧)하여 그날 밤으로 김 모라고 하는 무예청(武藝廳) 별감(別監)을 시켜 김 시종의 조카를 덕수궁 안으로 입내(入內)시켜 그 날 밤으로 고종은 선을 보았습니다. 그는 덕수궁 정문을 통하여 입내하질 못하고 몰래 불러들여 안으로 들어가는 입내였으므로 덕수궁의 담장이 원래 얕은 것을 알고 그 담장을 타고 넘어 들어간 것입니다.
이때만 하여도 덕수궁 안에는 매국노(賣國奴) 이완용(李完用)이 풀어놓은 궁녀들이 사방에 깔려있음으로 해서 김 시종은 조카를 떳떳이 정문을 통해 데리고 들어가지를 못하고 이처럼 담 장을 넘어 몰래 숨어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고종께서도 흡족해 하시고 김 시종의 조카를 양자로 삼으신다 하시고는 장래 덕혜옹주와의 가약(佳約)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쥐도 새도 모르게 추진되었던 이 사실이 뜻밖에 밖으로 새어나가 결국은 이것이 문제가 되어 김 시종은 직위해제를 당하는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고종은 안타까운 마음 어쩔 도리 없이 김 시종을 
아끼는 마음 변함은 없었지만, 결국 김 시종이 물러난 뒤에 덕혜옹주의 밀약(密約)은 한갖 물거품이 되고 말았던 것이죠. 그리고 고종께서도 그 해 1918년 12월(음력=양력으로는 1919년)에 승하하심으로 해서 덕혜옹주의 어린 시절은 시름과 한숨, 눈물 속에서 커나가야만 했었습니다.
덕혜옹주는 부왕의 상(喪)을 눈앞에 놓고 일본 시정자(施政者)들의 성화로 일본인 소학교인 일출소학교(日出小學校)에 입학을 함으로써 영친왕의 경우와 똑같은 운명으로 일본으로 떠나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덕혜옹주를 낳은 양 귀인도 이 사실을 알고 매우 안타까운 나머지 덕혜옹주를 끌어안고 얼마나 울었던지 모릅니다. 
운명의 장난에 벗어나지 못함이 인간사 어느 누구에게나 있는 것임은 부정하지는 못할 일이로되, 덕혜옹주가 살아나갈 길이 이렇게 정해져 있는 이상 그녀는 어떻게 더 버티고 고집을 부림으로 해서 이 난국을 타개할 방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일본 땅에 발을 디딘 덕혜옹주는 오빠인 영친왕이 살고 있는 궁(宮)의 일우(一隅)에서 가지고 온 짐을 풀었으며 왕공 귀족(王公貴族)이 다니는 학습원(學習院)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덕혜옹주가 학습원을 마친 때에는 이미 나이 19세를 맞는 어엿한 처녀 규수가 되어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덕혜옹주는 학습원을 마치자 이미 그 나이 19세 때에 짜놓은 각본과 같이 조선왕족들은 반드시 일본 왕족이나 사람들과 결혼을 해야만 한다고 규정을 그네들이 만들어 놓았으므로 일본측에서 덕혜옹주의 결혼 대상자를 대마도(對馬島)의 번주(藩主) 백작(伯爵) 종무지(宗武志)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당시 궁중에서 일을 보았던 일본의 늙은 궁인들이 떠올려 하는 말에 의하면, 종무지는 눈 하나가 불구인 애꾸눈이었고, 키도 아주 왜소(矮少)하였으며, 얼굴도 아주 못생긴 추남이어서 덕혜옹주가 이 사실을 알고 끼니도 끊어가면서 사흘 밤낮을 가리지 않고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들 궁녀들은 평소엔 덕혜옹주를 향하여 일본말로 
"공주님, 공주님"
하였지만 남들이 안 보는 데서는 덕혜옹주의 옆으로 바싹 닥아 들면서,
"정말 시집을 안 갈 거야? 안 갈 거야?"
하고 가뜩이나 마음 못 잡고 있는 옹주에게 욱박을 지르는 통에, 덕혜옹주는 그때로부터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고 합니다.
결국은 사전 계획에 따른 정책적인 결혼이었기 때문에 덕혜옹주는 대마도(對馬島) 번주(藩主) 백작 종무지(宗武志)와 결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한 3년 동안 같이 사는 동안에 옹주는 정혜(正惠)라는 딸아이 하나를 낳고 그만 돌이킬 수 없는 정신병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로써 종무지와의 결혼 생활도 그로써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고, 한참 잘 컸었던 딸 정혜는 오히려 어머니인 덕혜옹주를 많이 동정하여 그 아버지를 아버지로 안 보고 오히려 덕혜옹주와 함께 그 집에서 탈출해 나와 이름 없는 한 작은 섬에서 3년여를 같이 살다가 어느 하룻날 정혜는 바다에 몸을 던져 투신 자살을 하였습니다. 비극은 여기에서 끝났으면 좋았으련마는 그녀에게 닥쳐오는 시련은 신병에 대한 다시는 고칠 수 없는 이 정신병,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 이상 험난한 시련은 그녀에겐 없었던 것이었죠. 이때는 이미 조선이 일본의 지배 하에서 벗어나 광복을 찾았던 시기였고, 이후 정신병자 덕혜옹주를 영친왕 이은(李垠)씨가 돌보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비록 이복지간(異腹之間)이었지만 이은씨의 동생 아끼는 그 참마음은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를 못하였습니다. 덕혜옹주는 동경의 교외에 있는 송택병원(松澤病院)에 입원해 있게 되었는데 때마침 일본은 패전국으로서의 물가고(物價高)도 높았고 덕혜옹주에게 들어가는 치료비는 당시 1만 엔(円)이란 거금이었다고 하는데 영친왕은 이 큰돈을 아깝다 생각하질 않고 후일 옹주가 한국에 돌아올 그 날까지 계속 대어주었던 것입니다.
이때 당시 신문기자로 일하고 계셨던 김을한(金乙漢)씨가 덕혜옹주가 입원하였던 병원을 찾아와 보고 그 인상기 하나를 남겼는데, 그 내용을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 그 길로 나는 동경 시내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쯤 가는 그 병원을 찾아갔다. 신경과 병원으로는 일본에서 제일 오래 되었다는 송택병원에 가보니, 무슨 감옥과도 같이 음산한 공기가 떠돌며 중환자가 있는 병실은 마치 감방 모양으로 쇠창살로 막고 있었다.
안내해 주는 간호부의 뒤를 따라가, 한 병실 앞에 이르자, 간호부의 발이 딱 멈췄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40 여세의 한 중년 부인이 앉아있는데 창백한 얼굴에 커다란 눈을 뜨고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그 부인이 바로 덕혜옹주의 후신(後身)인 것이다. 
아무도 없는 독방에서 여러 해 동안을 오래 동안이나 우두커니 앉아있는 옹주가 어찌나 가엾고 불쌍한지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만일 고종황제가 이 광경을 보신다면 얼마나 슬퍼 하실까? 
어느 나리이고 왕가의 종말에는 허다한 비극이 깃드는 법이지만 고종의 고명 따님이신 덕혜옹주의 말로가 이다지도 비참하게 될 줄이야 어찌 뉘라서 상상인들 하였으랴!" <"인간 이은(李垠)"> P. 56.
김을한 씨는 이 글 외로도 직접 들려준 이야기는 더더욱 비참하였습니다. 덕혜옹주가 갇혀있는 독방은 독방이 아니라 한 방에 서너 명의 걸인(乞人)과 같은 여인들이 둘러앉아 화롯불을 쪼이면서 화롯불을 쪼이고 있는 그 손들이 모두 새까만 것이 가만히 보니 때는 11월이었고, 양말도 신지를 못한 채 맨발이었다는 것입니다.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는 영어(囹圄)의 몸에서 풀려나 고국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옹주가 고국 땅에 돌아오기까지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절대적인 배려와 힘이 컸었고, 음으로 양으로 언론인 김을한 씨의 적지 않은 힘과 운현궁의 박찬주(朴贊珠) 여사의 노고가 없었던들 옹주의 귀환은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덕혜옹주가 귀환하여 고국에 돌아왔을 때의 옹주의 나이는 이미 50을 넘기고 있었습니다.처녀시절 일본에 건너갔을 시에는 그처럼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던 덕혜옹주의 패기 찬 모습은 지금 40여 년을 지나서 고국 땅을 다시 밟는 불쌍한 덕혜옹주 지금의 모습에서는 아예 처녀시절 모습을 찾아볼 수는 없었습니다. 이 얼마나 애처로운 일이겠습니까? 
그녀가 고국 땅을 다시 첫발을 내디디고 저 했을 때 옹주를 길러주었던 유모 변씨가 달려와 옹주를 끌어안으면서 
"아기씨! 아기씨!"
하며 달려들어 엉엉 울다가 그만 혼절을 하였다고 하는데 그러한 광경을 덕혜옹주는 느끼지도 못하고 넋 나간 멍한 눈길로 쓰러진 유모를 잠깐 내려다보고 말았다고 합니다. 단 어떠한 한 마디의 말도 하질 못하고 말입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유모 변씨는 세상을 하직하였고, 옹주는 아직도 정신질환이 모두 치유가 되질 않아서 짙어진 병색은 그녀를 더 오래 살아있게 하진 못하였습니다. 
1972년 10월 어느 날, 별로 이름 없는 병원의 한 병동에서 고요히 고통 없는 생애를 막음하였습니다. 그래도 바로 이 해에 친지 몇 사람과 늙은 상궁들 몇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 한 가운데 화려하지 않은 조촐한 환갑을 치르기도 하였지만 요.


출처  KBS
출처 : 왕실과 황실의 역사▶역사지식Cafe
글쓴이 : 운영ノ施 縣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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