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

[스크랩] 순종비 순명효황후는 돌팔이 의사가 죽였다.

채운산 2008. 8. 21. 22:45

독일인 시의(侍醫) 분쉬 박사와 나(아손. 그렙스트)는 영사댁(領事宅)에서 처음 만난 후부터 꽤 친해져, 전날 밤을 그의 집에서 함께 지냈었는데, 무슨 일 때문인지 불만에 차있던 그는 내게 자기의 속사정을 털어놓았다.


" 저는 여기에 앉아서 아무 하는 일도 없이 그저 놀고 먹기만 하는데도 보수(報酬)는 톡톡히 받고 있습니다. 댓가도 치르지 않고 돈만 받는 것이 싫습니다. 그렇지 않고 가난한 병자를 위해 의술을 베풀려면 첫째로 돈이 필요합니다.


작년 11월에 제 진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요.

태자비(순종의 비)가 갑작스레 잃아 누워 그 병이 중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제가 환자를 보고자 청했으나 수락되지 않아 한 번 더 청을 올려보았지요.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 관습이란 것이 그러해서, 아무리 몸이 아픈 여자라 할지라도 친척이 아니면 얼굴을 맞대고 앉는 것을 금합니다. 제 청을 수락하지 않은 데 대한 하나의 구실로써 저에게 몇 가지 일이 부여되었는데 일이라야 고작 임금(고종)의 발에 생긴 티눈을 치료하는 것과 장관들의 여드름을 짜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일을 성공적으로 끝낸 댓가로 저는 임금께서 친히 하사한 비단 한 필과 은으로 장식된 보석함 두 개를 받았습니다. "


" 아니, 그러면 그동안에 태자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뻔하지요. 별의별 수단을 다 동원해 보았으나 결국 세상을 떠났어요.

 

내국인 의원들-육십 명이 넘는 숫자도 한결같이 여자지요-이 진단을 내리기를, 태자비에 마(魔)가 끼었는데 그것이 유별나게 악독한 것이라 했습니다. 온갖 치료를 다해 보았으나 아무 효험이 없었습니다."


" 실제로 무슨 병이었나요?"


" 그 증상으로 미루어 보건대 위(胃)에 무슨 이상이 있었던 것 같더군요. 배가 산처럼 부풀어올랐다고 합니다. 영험하다고 소문난 의사들은 벌서 오래 전에 아버지가 될 희망을 포기하고 체념 상태인 태자에게 태자비가 임신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이 희소식을 전한 여 의원은 많은 선물을 하사 받고 벼슬도 얻었지요. 그녀는 얼마 있다가 이것들을 보따리에 싸 짊어지고 바람처럼 종적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 기발(奇拔)한 친구로군요. 그런데 다른 의원 나리들께서는 뭐라 했습니까?"


"재주를 총동원해서 약을 짓고 달이고 했으나 소용이 없었지요. 궁중에서는 태자비의 목숨이 경각(頃刻)에 달렸다는 것을 깨닫고 조선에서 가장 실력이 있다는 남자 의원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 의원은 환자가 누워있는 방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했고, 그 대신 벽 한 칸을 사이에 두고 옆방에 앉아 진찰을 해야 했습니다. 가는 비단 줄을 환자의 손목 주위에 바싹 감아 벽 사이에 난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 의원의 손에 전달되었으며, 이런 식으로 그 의원은 진맥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의원은 조그마한 구멍 속으로 손을 넣어 태자비의 아픈 배를 진단할 수 있었는데, 의원의 손이 태자비의 배에 직접 닿는 것을 막기 위해 일곱 겹의 헝겊과 그 위에 또 솜으로 누빈 일곱 겹의 두꺼운 이불이 태자비의 배 위에 얹혀졌습니다. 결국 이 남자 의원은 자신의 동료 여 의원들이 내린 결론과 똑 같은 진단을 내렸는데 악귀(惡鬼)가 태자비의 배를 처소(處所)로 삼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악귀가 재빨리 자라나기 때문에 얼른 손을 써서 악귀를 몰아내지 않으면 사태를 수습하기가 곤란할 것이라는 경고까지 섞인 진단이었습니다. 의원은 그 악귀를 몰아내기 위해서 성문(城門) 중의 한 문짝에서 빼온 나무로 탕재(湯材)를 끓이도록 처방을 내렸는데 아침마다 환자가 이 탕재 한 그릇씩을 마시면 나을 것이라는 말이었지요. 꼭 아침에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태자비께서 탕재를 드시기는 했으나 그게 글쎄 아침에 드셔야 할 것을 저녁에 드셨다지 뭡니까? 며칠 뒤 태자비께서는 세상을 뜨셨고,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 그 영험한 의원은 궁중으로 불려갔습니다. 어째서 효험도 없는 탕재를 지어 올렸으며, 그 죄가 막중하기 이를 데 없어 생명을 부지키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고 추궁하자, 그 영험한 의원은 추호(秋毫)도 동요(動搖)함이 없이 태자비께서 돌아가신 것은 당연하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모든 일이 행해졌더라면 태자비께서는 지금쯤 완쾌되셨을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태자비께서 탕재를 아침에 드시도록 처방을 내렸으나 탕재가 저녁에 올려졌던 데에 근본책임이 있다는 논리였지요. 아무튼 그의 말을 빌면 이렇습니다.


<그렇게 처방이 지켜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태자비께서 완쾌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그 탕재야말로 성문의 문짝을 뜯어다 그 불로 달인 것이 아닙니까? 바로 성문의 문짝이란 말입니다.

 

이 간단한 논리를 이해할 사람이 궁중 내에 아무도 없다는 말씀입니까? 나라의 동량지재(棟梁之材)들이 그렇게 우둔(愚鈍)하다는 말입니까? 사람들이 밖으로 나갈 아침이면 성문이 열리는 것이고, 또 저녁에 성문이 닫히면 모든 사람들은 성안에 머물러야 하는 것 아닙니까? 따라서 아침에 탕재를 들면 악귀가 나갈 것이요, 저녁에 탕재를 들면 역효과가 나는 것이 이치일 것입니다. 따라서 악귀가 태자비의 뱃속에 남아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결국 그 남자 의원의 말은 그 죄상(罪狀)을 자신에게 따질 것이 아니라 탕재를 담당한 시종들에게 물어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그 영험한 의원은 목숨을 부지했으며, 나머지 의원들 중 대부분은 태자비의 병세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을 때에 이미 모두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러나 그 중의 네 명은 주의를 게을리 하여 자신들의 집에 남아있었는지라, 붙잡혀 투옥되었고, 그 뒤 그들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출처 : 왕실과 황실의 역사▶역사지식Cafe
글쓴이 : 지기ノ仁 賢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