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부분 생략)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 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반짝반짝 윤이 나는 칠흑 같은 흑발이었고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주빛 가루를 뿌린 듯 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왕비는 너무나 아름답고 풍성하며 주름이 많이 잡힌 짙은 남빛의 긴 능라치마를 입고 있었다.
또 진홍과 푸른색을 조화시킨 긴 소매의 능라 저고리를 팔 밑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목은 산호 장식으로 여몄다.
또한 여섯 가닥의 울긋불긋안 끈을 매듭지어 가닥가닥 산호장식을 해서 붉은색 술을 매어 여며 달고 있었다. 머리에는 관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가장자리를 모피로 두른 검정색 비단 모자를 앞부분에는 산호빛 장식술로 포인트를 주고 옆쪽에는 보석을 단 깃털 장식으로 해서 쓰고 있었다.
신발은 의상과 똑같은 능라 비단으로 짜 만든 것이었다.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중간 생략)
왕비는 정중할 뿐 아니라 기지가 넘치는 모습으로 개인적으로 많은 것들을 내게 말씀하시더니
잠깐 왕에게 무언가를 말하고는 곧 대화를 다시 시작해서 약 삼십분간 더 계속했다
알현이 끝나갈 즈음 나는 이 틀후 다시 와서 호수위의 누각을 사진찍어가도 되겠느냐고 여쭈었다.
(중간생략)
그 다음 3주동안 세번을 더 접견할 수 있었는데 두번째는 전처럼 언더우드 부인과 함께였고
세번째는 공식 리셉션이었으며 네번째는 전적으로 사적인 대담이어서 약 한 시간 남짓 배알했다
그때마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의 사려깊은 친절, 특출한 지적능력, 통역자가 매개했음에도 느껴지는 놀랄만한 말솜씨등 모두가 그러했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 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왕비의 주위에는 온통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중간 생략)
그녀의 삶은 하나의 투쟁이었다.
모든 매력과 영악함과 기민함을 다 동원하여 권력과 남편과 아들의 안전을 위해 그리고 대원군의 몰락을 위해 투쟁했다.
그것이 그녀의 생명을 단축시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의 전통과 관습을 거스르는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생략)
왕의 표정은 온화하다.
그는 특별난 기억력의 소유자로 한국 역사에 대해 썩 잘 알고 있어서 어떤 사건이나
구래의 관습에 대해 묹가 제기되면 어느시대 모월 모일 어떤일이 일어났는가를 정확하게
언급하면서 조목조목 설명해 낼수 있다고 한다.
왕실의 사서는 한직이 아니며 왕립 도서관은 경복궁내 건물중에서 가장 아름다운것 중 하나로 한문학에 관한 한 상당한 장서를 갖추고 있다.
왕에게 반외세 감정은 전혀없었다.
특히 유럽인들에 대한 선호는 특징적이다.
그는 복잡한 위기에 처했을때 유럽인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두번째로 배알했던 때에도 일본의 기세가 한결 등등해질 무렵이라 왕과 왕비는 유럽인들에게 특별난 관심과 친절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연못 위에서 스케이트 파티를 열어 모든 외국인 집단을 초대했었다.
기독교 선교사들에게도 왕은 퍽 친절하고 관대한 태도였다.
유럽인들 뿐 아니라 왕과 왕비의 미국인 의사들도 이들에게 따뜻한 애정을 가졌다.
나는 실제로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감정이 이처럼 착한 왕에 대한 애정어린 충성심과 신하들이 저지르는 억압, 횡포와 실정에 대한 뿌리깊은 반감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나는 오랫동안 왕의 성품에 대해 꼼꼼히 따져 보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한국정부의 단순이 허울뿐인 우두머리가 아니라 실세이기 때문이다.
통치자로서 그는 굉장히 근면하여 어떤분야의 업무에도 익숙했다.
무한한 보고문과 상소문을 접수해서 꼼꼼히 검토했고 정부의 이름하에 행해지는 모든일에 관여했다.
흔히들 그는 보통 사람이 할수 있는거 이상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해낸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어떤 일을 단단히 그러쥐고 밀어붙일만한 능력은 없다.
너무나 선하고 선진적인 생각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감동적이었다.
그가 좀더 강인한 성격과 의지를 가지고 무가치한 자들에게 그리 쉽게 넘어가지만 않았다면 훌륭한 통치자가 될수 있었을 것이다.
세번째 알현에서 왕은 대화의 초점을 유용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지적인 바램에 맞추었을 뿐 아니라 일본이 왕에게 압력을 가하고 있는 개혁에 대해서도 넌지시 내비쳤다.
내가 중국과 시베리아에서 본 것은 무엇이며 시베리아와 일본 철도에 대해서는 리(里>당 건설비가 얼마나 되는지, 일본인들이 전쟁에 대해서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은 어떠한지 등등을 상세하게 물어왔다.
또한 영국의 관리 등용제도와 귀족출신이 아닌 사람이 정부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묻고 답했으며 영국 귀족들은 어느정도의 권리를 가진 위치인지 그들은 하층민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등을 물었다.
어떤날은 왕과 왕비의 모든 관심이 영국 왕과 내각의 고나계에 쏠렸다.
특히 왕실 비용에 대해서 물으셨는데 이런류의 질문이 너무 많고 또 집요해서 거의 난처할 지경이었다.
특히 탁지부 대신이 왕비의 개인적인 경비에 재재를 가할수 있는지, 또한 왕비의 개인적인 비용을 그녀가 직접 부담하는지 아니면 국고에서 부담하는지를 꼭 알고 싶어했다.
각 장관들이 관장하는 일들에 대해서는 또다른 질문 선상에서 제시된 주제이다.
수상의 위치를 점하는 내부 장관의 임무에 관해서 많은 질문을 던졌고 그와 다른 장관들이 왕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도 물었다.
장관들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을때에 왕비가 장관을 해임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물었으나 이는 통역관을 통해서 도저히 설명해 줄수가 없었다.
영국 왕실에 대한 헌법상의 견제제도로서 군주는 명목상으로만 장관을 임명할 수 있다는 사상은 한국에선 완전히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 작별 알현을 요청받아 나는 공사관 통역관에게 같이 가기를 청했다. 관청 청사에 갔더니 평상시와 같은 예우로 무기를 든 병사들이 나를 맞아 주었다.
북적거리던 시종들도 없었고 지체할 필요도 없었다 내시 몇몇과 무관이 나를 툇마루 앞에까지 호위해가자 왕이 미닫이 창을 열어 들어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문을 닫았다.
내가 들어 온 곳이 왕족들이 종종 앉아 있곤 하는 정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알현실과 여기 사이에 놓인 미닫이 문은 닫혀져 있었고 정자는 기껏해야 2평정도 넓이였으므로 관례적인 깊숙한 절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는 수행원들, 내시들, 비단 저고리를 입고 왕과 왕비의 뒤에 서 있는 상궁들 등. 문 앞에서 북적거리던 일군의 사람들 대신 단지 왕비의 시녀와 통역관만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벽과 벽사이 움푹한 곳에 있어서 왕비를 볼 수 없었을 뿐더로 비굴해 보일 정도의 공손한 자세로 몸을 구부린 채 결코 땅에서 눈을 떼거나 속삭이는 정도 이상으로 목청을 높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철저한 주의로도 왕과 왕과 왕비가 바라는 만큼 완전히 사적인 비밀을 지켜낼 수는 없었다.
나는 알현실에 한 사나이의 그림자가 비치는 것을 문틈으로 확실히 보았다.
뒤이어 통역관이 "오늘은 전하의 말씀을 통역해 내기가 퍽 어렵나이다"라고 말한것은 재치있는 것이었다.
나중에 그 그림자가 바로 왕이 특별히 불신하는 6부대신중 한 사람의 측근이라고 들었다.
이 사람은 왕과 왕비가 외국인 공사에게 뭐라고 했는가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들어왔던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서 왕이 어떤 문제에 대해 말했는지는 언급할 수 없지만 한 시간 정도 지속된 알현이 상당히 흥미로웠다는 점을 밝혀 둔다.
어떤 면에서 왕은 그 언제보다도 자신을 강하게 나타냈다.
그는 이제 한국은 중국에 대해 공식적인 독립국이므로 한국 정부가 독자적으로 공사를 임명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한 힐리어씨에게 대단한 관심과 찬사를 표하면서 한국에 온 최초의 공사로 임명하는 것보다 더 그를 환대하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왕비는 빅토리아 여왕에 대해 "그분은 바랄 수 있는 모든것, 즉 명예와 부와 권력을 가지고 계시지요. 아들과 손자가 모두 왕이나 황제시고 따님도 여제라지요. 그런 영광속에서 온갖 선을 베푸시어 그분의 생애는 그 자체가 하나의 미덕이지요 저희는 그분이 만수하시고 번영하시길 빕니다"라고 했다.
왕은 이에 "영국 왕실은 한국의 좋은 친구입니다"라고 덧붙였다.
왕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몰락해져가는 빛바랜 왕족의 한사람인 나는 진정으로 감격스러웠다.
이때 왕비는 호박 자수를 놓은 능라저고리에 질질 끌릴정도의 감청색 능라치마를 입고 목에는 진홍빛 매듭에 장식술이 달린 산호노리개를 달고 있었다.
머리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풍부한 흑발을 뒤에서 한 다발로 매듭지었다.
진주와 산호 장식을 쪽진 머리에 꽂은것 외에 다른 장신구를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내가 떠난다고 하자 왕과 왕비가 모두 일어나셨고 왕비는 황공하옵게도 악수를 나누고 나왔다.
두분 모두 매우 친절하게 인사하며 다시 돌아와 한국을 더 많이 구경하고 가라는 뜻을 비추었다.
그러나 아홉달 후 내가 돌아왔을때 왕비는 이미 야만적으로 시해된 뒤였고 왕은 사실상 궁궐에 갇힌 죄수와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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