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

[스크랩] 명성황후를 바로보자

채운산 2008. 8. 21. 22:23

명성황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일본인들에 의한 것입니다.

 

그들은 한 나라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어느 나라 역사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잔혹한 행각을 벌이게 됩니다.

 

그들의 이러한 행각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하여, 국모인 명성황후를 왜곡하여 악인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이 왜 한 나라의 국모인 명성황후를 이토록 왜곡하고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명성황후는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정치적 파트너로 러시아를 선택하게 됩니다.

 

명성황후는 친일내각에서 반일내각으로 재구성함으로서 과감한 정치적 개혁을 모색합니다.

 

일본은 이러한 태도에 당황하게 되고,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기 위한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제거하려는 음모가 자행된 것입니다.

 

1895년 10월 8일 이른 새벽 건청궁에 침입을 하고, 당시 국모의 침소였던 옥호루를 점령하게 됩니다.

 

건청궁으로 들어올 수 있는 3곳의 입구는 철저하게 일본 군사들에 의해 폐쇄되었으며, 한 일본인의 칼에 의해 3명의 궁녀들과 함께 최후를 맞습니다.

 

명성황후의 시신은 인근 숲으로 옮겨졌으며, 불 태워졌습니다.

 

재는 땅에 묻었으며, 남은 잔해는 향원정(경복궁 내 연못)에 버려졌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에 의해 살해 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인물들은 신문기자, 군인, 장관 등의 인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일본정부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공사관으로 와 있던 "이노우에" 라는 인물은 외교에 능한 인물이며, 천왕에게 천거를 할 수 있는 7인(겐조) 중 한 사람 이였습니다.

 

 이노우에는 자신의 후임으로 "미우라"를 선임하고, 조선으로 불러들입니다. 미우라는 퇴역한 군인입니다.

 

미우라를 공사관으로 임명한 후 20여일이 넘도록 이노우에는 조선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관례상 이래적인 일 이였습니다.

 

그 후 이노우에가 일본으로 귀한 한지 17일 만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자행됩니다.

 

이노우에는 이 사건의 주모자로 정책적인 결정자 역할을 수행했으며, 미우라는 이 사건을 수행하고, 세부계획을 세우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입니다.

 

명성황후는 이렇게 일본정부의 철저한 계획과 음모에 의해 숨졌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이 후, 일본은 시해사건을 숨기기 위해 언론을 탄압합니다.

 

사건당시 서울에 있던 뉴욕헤럴드의 특파원 "커넬 코커릴"이 사건 직후 기사를 본국에 타전하려 했으나, 일본이 전신국에 압력을 가하여, 송신이 불가하게 하였습니다.

 

사건 당일, 미국의 공사관과 여러 열강의 공사관들이 일본 공사관인 미우라를 찾아가 사건을 추궁하는데, 미우라는 범행을 부인합니다.

 

하지만, 서양 외교관들의 범행수사에 의해 일본의 만행이 하나씩 본국에 알려지게 되고, 이것은 일본에 압력을 가하게 됩니다.

 

일본은 이러한 압력에 의해 재판을 하겠다는 명분으로 사건이 일어난지 16일 후 미우라를 포함 48명의 시해 혐의자를 본국으로 소환합니다.

 

(1895년 10월 24일) 1896년 1월 20일 히로시마 재판소는 증거불충분의 이유로 혐의자 48명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이것은 '일본인 누구도 이 사건에 개입하지 않았다'를 대내외적으로 선포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범행사실을 알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고 있습니다.

 

일본 외무성 외교 사료관에 보관되어 있는 "한국 왕비 살해 일건"에 우치다 영사의 사건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범인 명단과 증거품을 확보했으며, 그것을 본국에 보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이 보고서가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철저히 통제했습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인물 중 한 명인 "기쿠치 겐조"는 조선의 식민사관 신문사인 국민일보에 근무하던 신문기자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기쿠치 겐조에게 조선의 역사를 서술할 것을 부탁합니다.

 

그는 조선에 머물면서 나름대로의 자료를 모으고 그것을 토대로, 조선후기의 역사를 철저하게 당쟁과 분쟁의 역사로 서술하여 한국 근대사를 왜곡하고, 명성황후 역시 부정적 인물로 그리고 있습니다.

 

조선의 멸망과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명성황후에게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기쿠치 겐조의 제자인 "호소이 하지메"라는 사람도 명성황후를 부정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의 역사를 궁중에서 벌어진 추악한 복수의 역사로 그리고 있습니다.

 

한 나라의 최고 정치가의 정치적 견해를 음모와 술수로 보고 있으며, 명성황후와 대원군 두 사람의 대립을 친족간에 벌인 처참한 혈투로 왜곡하고 있습니다.

 

"호소이 하지메"는 신문에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싣고, 대중들에게 강연을 하고 다니면서 왜곡된 인식을 심어줍니다.

 

왕비가 정치에 나서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인식을 조장해 자신들이 저지른 국모 살해를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려는 의도입니다.

 

일본의 식민지를 거치며 일본에 의해 쓰여진 한국의 근대사, 그것은 철저하게 왜곡되어 식민사관을 우리들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을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근대사를 다시 조명할 필요가 있으며, 올바르게 역사를 인식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 알고 있는 명성황후 그것은 일본에 의한 잘못된 인식입니다.

 

명성황후의 주변인물들에 의한 그녀의 성품을 살펴보면, 명성황후의 주치의였던 언더우드 여사가 쓴 책을 통해 본 명성황후는 쾌활하고 소박하며 여러나라의 역사와 풍습 등에 관심이 많았으며, 서양의 교육을 조선의 실정에 맞는 교육으로 받아들이려 했음을 알 수 있으며, 왕권강화를 통해 국권이 강해지길 소원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고종 또한 명성황후를 신뢰하고, 의논하는 대상으로 여기고 있으며 정치적 동반자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 뛰어나며,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인물이라고 평하고 있습니다.

 

명성황후는 민씨 세력을 정권에 끌어들였는데, 이것은 다른 외척세력(예 :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과 같이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이 아닌, 왕권을 보좌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세력으로 고종 가까이에 둔 것입니다.

 

당시 외국인물들 또한 명성황후를 서술한 바 와 같이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일본식민사관에 물들어 처참이 생을 마감한 내나라 국모에게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말들을 하고있습니다.

 

바로 알고 일본을 응징해야할 것 입니다.

 

출처 : 왕실과 황실의 역사▶역사지식Cafe
글쓴이 : ♧.仁 賢.♧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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