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사진

귀 무덤

채운산 2008. 1. 12. 07:51
 


필자가 촬영한 이총(耳塚)


    귀무덤 - 글쓴이 : 여강 최재효



    누구나 자신의 조상에 대하여 존경하지 않거나 비방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종종 매스컴을

    통해 자신의 조상을 폄하했다는 이유로 법정소송을 벌이거나 가문(家門)들 간의 갈등을 본다.

    누가 해주최씨의 조상을 흉보거나 근거 없이 비판한다면 나 또한 분주(奔走)하리라. 자신의

    조상이 존경스럽고 귀하다면 남의 조상 역시 존경해야 도리가 아닐까 싶다. 이제는 도토리

    키 재기식의 이웃간 또는 가문 간의 분쟁에서 이제는 멀리 눈을 돌려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나는 이번 여름에 참으로 가슴 아프고 안타까운 현실을 체험하였다.



    애당초 원혼(冤魂)들을 달래주려고 간 여행은 아니었다.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고등학교

    재학 중인 두 딸들의 견문을 넓혀주기 위하여 배편을 이용해 현해탄(玄海灘)을 건넜다.

    왜(倭)의 7월 땡볕은 금수강산보다 따가웠다. 짜여진 일정대로 여러 곳을 돌아보다 나는

    아직도 팽팽한 두 민족간의 갈등이 존재하는 장소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뿌리고 무거운 발

    걸음을 돌려야 했다. 즐겁고 유익한 가족여행이 되고자 했던 것이 그만 슬픈 여정(旅程)이

    되고 말았다.



    교토(京都)는 AD794년 백제 의자왕의 후손인 칸무(桓武) 천황이 나라(奈良)에서 천도하여

    당나라의 장안(長安)성을 모방하여 만든 도시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시대까지 천년간

    왜의 심장이었다. 그러한 곳에 사백 성상(星霜)동안 고통 속에 통곡하고 있는 조선의 원혼

    (冤魂)들이 있었다. 1592년 왜의 땅을 통일한 토요토미히데요시(豊臣秀吉)는 다이묘(大名)들

    의 불만을 누르고 허황한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하여 조선을 침범한다. 물론 두 번에 걸친

    길고 긴 전쟁에서 패한 그는 결국 죽음을 맞고, 그의 수하였던 도쿠가와이에야스(德川家康)

    에게 풍신수길의 가문은 문을 닫게 된다.



    그러나 풍신수길은 비참하게 죽었지만 그는 현재 일본에 살아있는 최고의 신(神)으로 존경

    받고 있다. 그러한 사실은 오사카에 가면 확연하다. 특히 그가 만들었다고 하는 오사카성은

    죽은 토요토미의 혼령이 거주하는 장소였다. 층층마다 그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유물들로 가득하다 못해 짜증이 날 정도다. 당시 피폐했던 오사카를 오늘날의 상업도시로 키운

    그를 오사카 사람들은 하나님처럼 생각하고 있다.


    교토에 반도(半島)의 핏줄들이 사만명이나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교토를 비롯하여 왜 땅에 수백만의 반도의 혈손들이 있지만 그들

    누구도 귀무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듯 하다. 사연이야 많겠지만 거룩한 혈손

    임을 감추고 거짓 왜인으로 행세하며 살아가는 그들 마음 역시 편치는 않으리라. 그 곳을

    찾았을 때 나를 맞이한 정령(精靈)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귀가 따가웠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고향에서 듣던 소리였다. 나는 콧등이 시큰해지면서 가슴이 울렁거렸다.



    매음 매음 매음 매음 매에~~~



    오사카 성을 찾았을 때 성난 울음소리로 이국인(異國人)들에게 고래고래 악을 쓰던

    왜(倭) 토박이 쓰르라미들과 달리 일정한 간격을 두고 슬프게 울고 있었다. 지금까지 수천

    수만의 반도의 후손들 발길이 이곳에 닿았을 터, 그러나 마치 나와 아무상관 없는 듯 눈길 한번

    주고 시시덕거리며 기념사진 한방 박고 매정하게 돌아섰을 모습을 보고 정령들은 가슴이 미어

    졌을 것이다. 정령들은 고국에 두고 온 어미를 부르고 있었다. 울음소리는 송아지가 어미를
    찾는, 지독지정(舐犢之情)을 간절히 원하는 슬픈 아리랑 가락이었다. 나는 복받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눈물을 쏟고 말았다. 큰 딸이 벌겋게 상기 된 채 남몰래 눈물을 닦고 있는

    나를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평소에 보지 못했던 아빠의 모습에 딸 아이는 자꾸만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두 차례의 왜란(倭亂)이 끝난 뒤 전라도 어느 지역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의 귀와 코가 없었

    다고 한다. 코와 귀를 왜병들에게 강제로 절단당한 우리 조상들은 회한(悔恨) 속에 치욕스러운

    삶을 살았을 것이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 불감훼상효지시야(不敢毁傷孝

    之始也)’라는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구한말 단발령(斷髮令)에 항거하던 선조들을 알고

    있다. 머리카락을 잘려도 이러했거늘 심지어 코와 귀가 잘렸으니 말해 무엇하랴. 귀무덤에는

    살아있던 조상들 뿐 아니라 왜군과 싸우다 순절한 수많은 조선의 병사들의 코와 귀가 있을 터,

    낯선 땅에서 영면(永眠)하지 못하고 긴긴 세월을 원혼이 되어 떠돌고 있을 조상들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왜인들은 요즘 사이판을 비롯하여 남양군도(南洋群島)들 샅샅이 찾아다니며 2차대전 중 사망

    한 자신들의 혈육들 뼛조각을 찾아 위령비를 세우고, 당시의 패배의 쓴 맛을 다시고 화려했던

    한때를 회상하고 있다.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살아있는 신이 되어 이총(耳塚)을 관리하고 있는 한,

    열도(列島)와 반도(半島)의 갈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테고, 왜인들은 과거 36년의 달콤한 미몽

    (迷夢)에서 깨어나지 못하리라. 자신의 조상이 귀하면 이웃의 조상 역시 귀한 것을 그들은 애써

    외면한 채 고집을 부리고 있다. 언제 원혼들이 다시 현해탄을 건너와 못 다한 한을 풀고 편하게

    아리랑을 부를까. 돌아서는 발길이 천근만근이다.




    - 2007. 7. 29. 10:30 일본 교토 이총에서 -




    1. 다이묘(大名) - 왜에서 10세기경부터 19세기 말까지 넓은 영지와 강력한 권력을 가진 유력자 를 일컫던

    말이지만 후에는 무사계급의 우두머리를 다이묘라 부름

    2. 지독지정 - 어미소가 송아지를 핥아 주는 지극한 사랑

    3. 신체발부수지부모 불감훼상효지시야 - 몸은 털끝부터 발끝에 이르기 까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니

    함부로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도의 첫 걸음이다. (孝經)

    4. 귀무덤 -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병들이 조선인들의 귀와 코를 베어가 만든 무덤으로 일본 교토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