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이사도라 던컨' 최승희의 생과 춤
<신간> 사진과 자료로 보는 최승희
최승희는 '동양의 이사도라 던컨'에 비유되는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무용가다.
<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 (정수웅 엮음. 눈빛 간)은 지난 90년대 초부터 10여년간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중국.미국.러시아.프랑스 등을 돌며 수집한 최승희의 사진과 자료를 모은 것으로, 최승희가 살아간 치열한 삶과 예술혼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엮은이는 우리 무용사에서 최승희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이렇게 말한다.
"이사도라 던컨이 그리스.로마 시대의 조각을 무용으로 재현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것처럼 최승희는 중국 운강석굴의 조각에서 영감을 얻어 <석굴암의 벽조>라는 무용을 창작하고 그의 제자들이 실크로드 선상의 <돈황무용>을 천년 만에 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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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위). 최승희가 북한에서 숙청당하기 1년전의 마지막 모습(1966)(아래) ⓒ프레시안 |
그러나 최승희는 최근까지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비극적인 예술가였다. 일제 때 친일을 했으며, 해방 후 월북을 했기 때문에 남한에서 그에 관한 책은 한때 불온서적 취급을 받았다. 북한에서도 그는 통치이념을 거스른다는 이유로 말년에 정치범 수용소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러나 탄생 90주년을 즈음으로 최승희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북한에서도 최승희의 묘를 애국열사릉 으로 이장시켜 정치적으로 복권시켰다고 한다. 최승희의 사망시기는 80년대초로 알려졌으나 확실치 않다.
이 자료집에는 20세기 격동의 시대에 파란만장한 삶을 산 현대무용가 최승희의 개인사를 보여주는 사진과 자료, 무용가로서의 활동을 보여주는 다양한 사진과 자료 등 보기 드문 자료 등이 다수 수록돼 있다.
자료집에 따르면 1911년 11월 서울 수운동에서 출생한 최승희는 26년 일본 현대무용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제자로 들어갔다. 1930년 2월1일 최승희의 신무용발표회가 처음으로 경성공회당에서 열리면서 무용가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다.
최승희는 기방이나 지방 춤꾼들로부터 전통춤을 익혀 전통무용과 현대무용과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31년 5월9일 최승희는 스무살의 나이로 와세대대 러시아문학과에 다니고 있던 한 살 위의 안필승과 결혼했다. 안필승은 와세다대 졸업 후 이시이 바쿠의 이름을 따서 안막(安漠)으로 개명했다.
34년 최승희는 일본 청년회관에서 제1회 발표회를 열었다. 엮은이는 "그때 저명한 소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본 최고의 무용가가 탄생했다고 절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말한다.
무용을 시작한 지 10년, 조선과 일본의 저명인들이 최승희 후원회를 만들었다. 발기인에는 여운형,마해송,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포함돼 있었다. 36년 최승희는 베를린 올림픽 우승자 손기정과 함께 억압받은 한국인의 우상이 되었다.
37년 최승희는 처음으로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첫 해외공연을 가진다. 그러나 최승희의 공연포스터에 '재퍼니즈 댄서'라는 소개에 자극받은 재미동포들의 반일운동으로 공연은 중단됐다.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갈 수 없었던 최승희는 뉴욕 할렘가에서 1년 가까이 그림 모델 등을 하며 버텼다.
38년 12월17일 최승희는 고대하던 유럽 공연의 기회를 잡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두번째로 큰 극장인 샬르 플레엘에서 최승희는 유럽에서 첫번째 공연을 가졌다. 초립동 춤이 가장 인기를 끌었는데, 최승희는 후에 김백봉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프랑스는 이상하다. 내가 초립동 춤을 추고 난 지 일주일 만에 파리 전체에 그 초립동 모자가 퍼지더라. 그만큼 유행에 민감한 곳이란다".
최승희의 쌍검무(34년 일본 청년회관에서 열린 제1회 발표회-좌)
최승희의 쌍검무(34년 일본 청년회관에서 열린 제1회 발표회-우) ⓒ프레시안
브뤼셀,로마,헤이그 등 유럽 순회공연을 끝내고 다시 파리로 돌아온 최승희는 대망의 무대인 '예술의 전당' 국립극장 샤이오에 섰다. 관중 속에는 당시 피카소,장 콕도, 로망 롤랑 등 문화예술계 명사들이 있었다. 프랑스의 <피가로>지는 최승희에 대해 "선이 아주 환상적인 동양 최고의 무희"라고 격찬했다.
당시 파리 공연에서 주목받은 춤은 최승희를 대표하는 춤으로 평가받는 '보살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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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희 춤을 대표하는 보살춤 ⓒ프레시안 |
유럽 공연의 성공으로 다시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한 최승희는 30년대 후반 유럽,미국,중남미 등에서 1백50여회의 공연을 해 동양의 무희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최승희는 41년 12월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만주와 중국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 위문공연에 투입되어야 했다. 공연 횟수가 1백회가 넘을 정도로 그는 관동군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끌려가 공연을 해야 했다.
최승희는 몽고를 돌아 다른 전쟁터로 이동할 때 운강석굴을 방문했다. 운강석굴은 약 1천5백여년전에 만들어진 중국 최대의 석굴사원이다. 동굴에슨 5만1천개 정도의 불상이 조작돼 있다. 최승희는 이 거대한 불교예술에 큰 감명을 받아 불상의 다양한 자세를 무용으로 승화시켰다. <석굴암의 벽조>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일본 군부로부터 예술가들에 대한 압력이 더욱 강해지는 가운데 최승희 부부는 만주의 일본군을 위문한다는 명복으로 중국으로 향했다. 그 후 최승희는 두 번 다시 일본 땅을 밟을 수 없었다.
45년 8월 해방이 됐으나 중국에 있던 안막은 청년시절부터 사회주의를 신봉하고 있던 처지여서 해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몹시 고뇌했다고 한다. 결국 45년 8월말 안막은 중국내 조선인 공산군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한편, 최승희는 이듬해 김백봉을 비롯한 제자들을 데리고 중국 천진에서 조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해방 후 서울에서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됐다. 친일파로 몰린 최승희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 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회에서건 내가 조선의 딸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승희는 북한에 가 있던 안막으로부터 강력한 요청을 받고 46년 7월 38선을 넘어 북으로 갔다. 최승희는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김백봉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김백봉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최승희 동무 살러 왔소, 다니러 왔소"라고 물었다. 김일성은 "살러 왔다"는 최승희에게 원하던 대로 대동강변 요정이었던 동일관 자리에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다.
석굴암의 벽조(1943) ⓒ프레시안
북한 무용동맹위원회 위원장이 된 최승희는 50년 6월초 2백명의 대규모 예술단과 역시 단원이었던 딸 성희를 데리고 모스크바에 갔다. 소련 각지를 돌며 공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6.25 전쟁 때 평양이 유엔군에 점령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건물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최승희는 52년 김일성과 주은래의 배려로 중국 북경에 오게 되었다. 엮은이는 "최승희는 중국 고전무용을 발굴하고 현대화하는 데 힘을 쏟아 지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무용에 두 가지 유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최승희 류"라고 전한다.
최승희에게 매료되었던 주은래는 최승희의 춤 가운데 <신노심불로>(身老心不老)를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주은래가 특히 좋아했다는 최승희의 춤 <신노심불로> ⓒ프레시안
53년 7월 6.25 전쟁이 끝나자 최승희는 평양으로 돌아갔다. 54년 남편 안막은 문화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었고, 2년 뒤에는 문화선전부 부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엮은이는 "최승희 부부의 위세는 마치 뜨는 해와 같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59년 최승희 가족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북한 정권 내부에서 대규모 숙청이 단행된 것이다. 안막도 이때 숙청당해 강제노동 끝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승희는 이런 위기상황 아래에서도 무용교재인 <조선민족무용기본>(1957)을 남겼다. 이 교본은 남한에서도 같은 이름으로 뒤늦게 출판(1991.동문선)되기도 했다. 한국춤의 기본동작을 문자와 그림으로 자세하게 기록했다는 점에서 무용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여겨지고 있다.
왼쪽부터 30년대초 최승희, 검무, 무당춤 ⓒ프레시안
왼쪽부터 30년대 최승희, 승무, 보살춤 ⓒ프레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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