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장군의 무덤은 3개다
▲ 이순신 장군의 첫번째 무덤 완도군 묘당도 월송대
나는 이순신 장군의 무덤을 전남 완도군 묘당도에서 처음 보았다. 그리고 불과 두 달이 흐른 8월 중순 경상남도 남해군에서 노량에서 또 다른 장군의 무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장군의 고향인 충남 아산에 있는 무덤은 또 무엇이라는 말인가?
강진군 마량항에서 배를 타고 5분을 가면 완도군 고금도가 나온다. 이 섬에 달린 작은 섬 묘당도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의 마지막 총본영이 있던 곳이다. 현재는 이순신 장군과 이영남 장군을 모신 충무사가 있다.
▲ 장군의 두번째 무덤인 남해군 충렬사 가분묘
묘당도는 남해에서 서해로 진입하는 길목으로 좌로는 마량, 우로는 약산도의 좁은 협수로를 두고 있어 군사적 요충지일 뿐만 아니라 증도, 넙도, 원도, 입도, 초완도, 장고도, 소죽도, 정개도 등 수많은 섬들이 진을 치고 있어 이곳을 치지 않고는 인근 완도, 강진, 해남, 진도 등에 대한 침입은 사실상 불가능해 방어에 최적의 요건을 갖추고 있는 섬이다.
이 묘당도 충무사 앞 작은 언덕이 장군의 두 번째 무덤인 월송대다. 월송대는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충무공이 유해가 잠시 남해군 관음포에 안치되었다가 이곳으로 옮겨와 80일 간을 모셨던 곳이다. 기이한 것은 이 무덤엔 4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풀 한포기 돋아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장군이 ‘죽어서도 바다를 지키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풀숲에 가려 바다가 보이지 않는 것을 원치 않아 풀 한포기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충남 아산시 어라산의 세번째 무덤
첫 번째 무덤은 1598년(선조 31년) 11월19일(양력 12월16일) 장군이 전사한 경남 남해군 설천면 노량 인근 충렬사에 있다. 장군의 무덤이 여기에 자리 잡은 이유는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도망가는 왜군을 추격하다가 왜군 저격병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후 육지로 옮겨져 누운 곳이 인근의 고현면 관음포이기 때문이다.
조선왕조는 장군이 전사한지 234년이 지난 1832년(순조32년) 홍문관 대제학 홍석주의 글로 노량의 관음포에 이충무공번몰유허를 세웠으며 마지막 해전을 치르다 전사한 노량에는 장군의 가분묘가 세워져 있다.
▲ 남해군의 이순신장군전몰유허 이락사
그리고 세 번째 무덤은 전사한지 80일 뒤인 1599년 운구 되어 2월11일 충남 아산시 음봉면 금성산에 장사되었으며 전사 16년 뒤인 1614년 어라산에 이장되었다. 돌아가신지 100일이 지나고 전쟁이 완전히 끝난 다음에야 고향땅에서 편히 눈을 감으신 것이다.
장군의 무덤이 지키고 서있는 묘당도와 노량은 감히 왜군이 다시 침범할 수 없는 땅이었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 30대 문무왕이 바다에 수중릉(대왕암)을 만들어 용이 되어 바다를 지켰듯이 장군 또한 죽어서도 남해바다와 서해바다 입구에 터를 잡고 바다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 남해군 관음포의 이순신장군전몰유허
그런데도 나는 여태 장군을 오해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장군이 머물렀던 곳이면 어느 곳이나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내미는 일본 만주관동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소좌 때문이었다. 이 사람은 이순신 장군이 머물렀던 곳곳 마다 자신이 손수 쓴 편액을 내 걸고 마치 자신이 나라를 지키는 이순신의 현신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싶었나 보다.
이 편액은 남해에서도 여지없이 발견된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때려잡던 관동군 출신인 이 장교는 훗날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를 추격하다가 왜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장군의 유해가 안치됐던 이충무공전몰유허에 이락사(李落祠), 대성운해(大星殞海:큰 별이 바다에 지다)라는 편액을 손수 내려 걸게 했다.
▲ 완도군 묘당도의 충무사
또한 이 일본군 장교는 대한민국의 장군이 되었고 쿠데타를 통해 정부를 무너뜨리고 이 나라의 첫 번째 군사정권을 세워 대통령이 되었던 박정희다. 참 어이없고 슬픈 역사다.
그는 일본군 장교 출신이라는 자신의 치명적 콤플렉스를 충무공의 그늘에서 감추려고 했던 모양이다. 남로당 군부 책임자였던 그가 쿠데타 이후 반공을 국시로 정하고 만주에서처럼 민주인사 토벌(?)에 열을 올렸던 것 또한 이런 콤플렉스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싶다.
▲ 묘당도 장군무덤엔 풀한포기도 나지 않는다.
나는 지난해 겨울 이웃 섬 약산도에서 만난 좌익계열 독립운동가 정병직 선생 가족들의 불행한 가족사를 본 적이 있다. 엊그제까지 일본군 순사였던 이들이 하루아침에 대한민국의 경찰이 되어 쇠꼬챙이를 이용해 독립운동가의 아내를 여자로서 차마 감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고문했다고 한다. 천재소리까지 듣는 아들은 연좌제로 묶어 평생 섬 밖으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결국 화병으로 세상을 하직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또 그 손자들은 그런 치 떨리는 현실에 정신을 놓아 버리고 병원을 전전하다 누이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오직 이유는 하나였다. 이 나라가 친일하면 삼대가 흥하고 반일을 하면 삼대가 망하는 친일파들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일본군 장교의 집안도 3대가 흥할 모양이다.
▲ 이순신장군이 돌아가신 노량바다
남해에서 발견한 박정희의 편액 이락사(李落祠). 이락이라면 ‘이순신 장군이 돌아가신 곳’이라는 표시인 셈인데 박정희, 아니 일본군 장교 다카키 마사오 소좌는 어떤 마음으로 조선군 수군 총사령관의 편액을 만들었을까? 그리고 황송해 하며 그 편액을 내건 이들은 또 어떤 이들이었을까.
지금이라도 전국 곳곳 이순신장군의 유적마다 자리 잡은 일본군 장교의 편액이 철거되었으면 좋겠다.
▲ 남해바다에 버티고 선 거북선
김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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